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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제국의 몰락 (2)

중국中國/명明
장거정張居正은 중국 4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5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이미 진사가 되었다. 이 시기는 명나라가 건국되고 이미 150년이 흐른 때로, 제국의 많은 부분에서 노화와 병폐가 쌓여가고 있었다. 장거정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가 되자 『진육사소(陳六事疏)』라는 행정개혁에 관한 글을 지어 황제에게 올렸다.

① 공론을 줄일 것. 곧 모든 일에 헛된 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도록 한다.
② 기강을 잡을 것. 곧 관직의 수여와 형벌을 공명정대하게 하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서는 안 된다.
③ 명령을 중시할 것. 곧 조정의 교지나 칙명이 잘 행해지도록 한다.
④ 명실상부할 것. 곧 인재를 신중히 헤아려 작위나 상을 내리고 이부에서는 관리를 성실히 고과하여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도록 한다.
⑤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 곧 나라의 풍속이 사치스럽고, 재부와 권력이 균등히 배분되지 않고 편중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이러한 작태를 청사하도록 한다.
⑥ 군비를 바로 갖출 것. 곧 군사와 변방의 관리를 정선하고 훈련을 강화하며, 군의 기강과 군비 확충에 주력하면 국방은 저절로 공고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후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어떤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될 것인지 알려주는 서막이었다. 융경제가 서거하고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장거정은 사실상의 독재를 확립하고 강력한 권한으로 개혁을 시행해 나갔다. 장거정은 국고를 튼튼하게 하고 재정을 강화하는 한편, 기존까지 행정적 효율성이 결여되어 있던 관료기구에도 손을 대어 성과 위주의 인사제도를 채택했다.

장거정은 우선 관료들의 효율성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관료조직은 과거로 인해 뽑혔지만 그들을 유지하는 것은 인맥과 친분, 그리고 도덕상의 규율이 주였다. 때문에 그 효율성은 심각하게 낮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장거정의 시대에 들어와 고과(考課)를 평가하기 위한 고성법考成法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통하여 관료조직의 효율성은 향상되었고 미납된 세금도 제대로 걷히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장거정은 몽골인과 무역을 재개하여 불만을 없애 남침을 줄였고, 동북지방은 건주위를 정벌하여 저항의 싹을 없앴으며, 서남의 좡족도 평정하는 등 제국의 외환을 없애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군사적 성과를 넘어서 명나라의 군조직 자체를 개선하여 이루어진 성과로, 군사훈련의 강화와 장교의 질 향상, 그리고 만리장성의 보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그의 최고 업적은 전국적인 측량과 일조편법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세입은 토지 위주였으나 정작 그 토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향신鄕紳들은 소유한 땅을 은닉하는 일이 다수였고 부과되는 세금도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장거정은 양세법을 폐기하고 일조편법을 시행하여 세금을 일원화하는 한편 이렇게 은닉된 토지를 대규모로 적발해내어 정부의 수입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거정의 개혁은 신사층과 부호, 지주들의 거대하고도 심대한 반발을 불러왔다. 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은 관료조직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신사층과 부호는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에 분노했다. 결국 장거정은 사후 관료들에 의해 탄핵당했고 그의 개혁은 후퇴했다. 만력 12년에 장거정의 죄상이 공표되었다. 이후 내각대학사에 임명된 신시행(申時行)은 문관집단의 수복에 들어갔다.

이 사건에 대해서 장거정이 잘났고 관료들이 잘못했다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장거정의 시대에 있었던 개혁들이 당시 관료집단의 인식에서 가능한 일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당시 문관들의 도덕은 행정과 기술, 원칙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제국을 유지해주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다. 효율은 재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정부가 만약 이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강력한 행정조직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방대한 관료집단과 봉건제도를 타파해야만 가능한 영역이었다.

당시 행정효율을 보기 위해서 장거정이 일조편법의 시범 케이스로 지정한 복건성을 예로 들어보자. 장거정은 이곳을 시작으로 해서 제국 전체의 세제를 재편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만력 6년에 복건성의 인구를 대대적으로 조사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황당하게 나온다. 홍무26년(1393년)의 전국인구조사시에 복건성은 81만5천여호(戶)에 391만6천여구(口)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난후에 이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은 겨우 51만5천여호, 173만8천여구에 불과하였다. 몇대가 내려온 다음에 호구가 오히려 60%정도 수준으로 감소된 것이다.

물론 정말 인구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재고해보건데, 그보다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은 조정이 그 지역의 인구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이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조직은 실제 업무보다는 도덕적 원칙에 의해 뽑혔고, 그 도덕적 원칙과 규범이 곧 제국을 통합하는 열쇠였으며 관료조직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이 도덕적 힘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명나라의 사회는 도덕적 원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게다가 그 도덕적 원칙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 황태자 책봉의 문제에 얽힌 만력제는 관료집단에 크게 분노하여 파업(이라기보단 가출에 가까운 행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중심 축을 잃은 문관집단과 황제 사이의 균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장거정의 개혁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명나라의 재정도 위태해졌다. 만력 3대정에 이르러 재정이 크게 부족해지자 황제는 전국에 환관을 파견하여 은광을 개발하고 무분별하게 세금을 걷어 문제를 타개하려고 했다. 이것은 명나라의 사회 균열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았다. 지배계층도 동요하기 시작했고 균열이 발생했다. 동림당東林黨이 탄생한 것이다.

만력제는 그의 선조였던 홍무제처럼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할 수도 없었으며 영락제(永樂帝)처럼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치제(弘治帝)처럼 문관들과 조화하는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서 소심하게 자랐으며 항상 제국의 후계자로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만력제는 죽을 때 까지 그의 정신에 가해진 금제를 헤어나지 못했다. 황태자의 책봉문제에서 황제가 보인 태도는 졸렬하기까지 했다.

만력황제가 죽고 난 뒤 이제 명나라는 도덕적 윤리규범의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만력 3정은 끝났지만 재정은 고갈되어있었고 만주족이 다시 발흥하였으며 민란도 거세어졌다. 이러한 양쪽의 적에 맞서서 제국은 군비를 확충하고 군대를 증원해야 했지만 이것은 명나라의 행정적 취약점을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북경이 함락된 1644년까지 군사들에게 지불되지 못한 급료만 해도 백은 수백만냥에 달했다. 호부에서는 재정 초과분을 평균하여 각 현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빈곤한 현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1632년에 지방정부의 기운(起運 : 중앙정부나 주둔군에게 수송하는 물품)체납율은 이미 50%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각 현의 내부적으로도 세금은 모든 납세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나마 일부 부유한 납세자들은 세금감면특권을 사용하여 빠져나가고 저소득 토지소유자들에게 전가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조편법에 의해 세금은 은으로 일원화되어 거두어졌다. 그 은의 대부분(약 2000만냥) 강남의 부유한 현에서 거두어졌고 그 중에 북경과 변방의 군대에 지급되는 양이 500만 냥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된 경제 순환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지급받은 지역은 강남에 비해 빈곤한 지역이었으며 때문에 이를 남방에서 생산된 면화와 면포 등의 구매에 사용되어 다시 남방으로 회수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회수 장치도 고장난다. 북방과 변경에 투입된 은이 회수되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고 은이 있어도 군비를 갖출 수가 없었다. 1619년 요양遼陽에서는 은을 가지고도 의류를 구입하지 못해 내의 없이 맨몸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있었다. 그나마 보내진 은들은 지휘관에 의해 착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력 연간은 명나라 역사의 전환점이다. 한세기 반에 걸쳐 축적된 모순들은 이 시기에 폭발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 문제에 직면하여 도전했고, 실패했다. 이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 대제국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엄청난 부가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었으며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군대가 곳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들이 굶주림을 참지 못해 민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물론 먹을 것이 있었다 해도) 자국의 촌락과 도시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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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가 자살하고 그 시체가 식기도 전에 이자성의 대순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처음 북경의 민중들은 그들을 환영했으나 이내 반란군들은 본색을 드러내 약탈을 시작했다. 대순군이 40여일 동안 북경에 있으면서 약탈한 재화는 백은만으로 3700만냥에 달했다. 오삼계와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패배한 농민군은 수레에 가득 재화를 담고 도주했다.

만력제가 죽고 아직 나이든 노인들이 그 장엄한 장례식을 기억하고 있을 때, 북경에 만청의 군대가 들어왔다. 이들도 명나라의 체제를 물려받았으며 과거시험을 시행했고, 도덕적 원칙으로 제국을 유지하였다. 강희, 옹정, 건륭에 걸친 강건성세를 거치면서 부유해진 청제국은 자신감에 넘쳐 탄정입무를 선언하였다. 청 조정은 잉여생산물을 거두어 그것으로 재투자한다는 생각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후로 조세는 오로지 토지에 부과되었고 사람에게 부과되지 않았다. 호구조사를 피할 필요가 없으니 전국적으로 정부장악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장거정의 시대로부터 200년이 흐른 후인 청나라 도광14년(1834년), 복건성은 여전히 재난이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었다. 그런데, 이 때의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의 인구는 1500여만으로 급격히 불어난다. 200년전보다 9배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호구도 마찬가지로 7배가량 늘어나서, 전국인구는 놀라운 수준인 4억900만에 이르게 된다.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인구의 증가를 태평성세의 증거라며 자축했다.

대명제국의 몰락 (1)

중국中國/명明
지난 17년동안 숭정제는 어떻게 해서든 왕조의 몰락을 막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지난 세기동안 쌓여온 모순은 마치 운명과도 같이 명나라와 황제를 덮쳤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일어날 일이라기보단 이미 일어난 일과 같이 느껴졌다.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대순大順 농민반란군은 북경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2월에 대순군의 격문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자신만만한 이자성은 3월 15일까지는 북경에 도착할 것임을 천명했다.

황제는 급히 오삼계에게 근왕을 명령하려 했지만 이에 필요한 군자금조차 부족했다. 당시 호부에 남은 돈은 40만냥에 불과했다. 절박해진 숭정은 신하들에게 가진 재산의 일부라도 기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집안이 힘들다 말하며 최대한 이를 회피하려고 했다. 어떤 자는 50만냥의 재산이 있었지만 기껏해야 3천냥만 기부했을 뿐이었으며, 12만냥을 지닌 환관이 1만냥을 내놓은 것은 대단한 편에 속했다. 100만냥의 군자금이 필요했지만 모인 돈은 턱없이 20만냥 뿐이었다.

3월 17일에 대순군은 이미 제국의 심장부까지 도달했다. 황궁에까지도 전쟁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회도 열리지 않았으며 어느 문무백관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친히 종을 울려 백관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태감이 홀로 있는 황제를 보고 놀라 다가왔다. '이미 내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황상께서는 속히 떠나십시오', '대영병은 어디있는가?' '대영병은 이미 흩어졌습니다.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말을 마친 태감도 급히 몸을 돌려 도망갔다.

그가 즉위하기 전, 전대의 황제인 천계제는 17살난 다섯째 동생 주유검朱由檢을 불렀다. "다섯째 동생은 요순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 이 최후의 황제는 느꼈다. 대명왕조는 이미 끝났음을. 이제 그는 남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황제는 황후비빈들을 불러 스스로 정리하게 하였다. 어떤 이들은 통곡하고 어떤 이들은 허리띠를 풀러 자진하였다. 15세의 공주는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숭정도 비통을 금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말했다. '너는 어쩐 일로 우리 집안에 태어난 것이냐?' 그는 말을 마치고 왼손으로 얼굴을 가린체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이후 아직 숨이 붙어있는 비빈들을 내려친 황제는 매산煤山(혹은 만세산萬歲山)에 올라가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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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중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진한 황제라면 누가 뭐라 해도 홍무제가 제일로 꼽힐 것이다. 명대에 이르려 조정은 대륙 전체를 통괄할 행정체계를 마련하려 했으며 그 덕분에 명나라는 중앙이 전국 각지의 수많은 현의 임명권과 그들의 급료 인상분까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과 비교하면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명나라가 관료체계가 발달했다고는 하나 이것은 명분상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 중앙정부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숫자를 한자로 적을 때, 一, 二, 三, 四, 五, 六, 八, 九, 百, 千라고 한다. 그러나 회계에서는 숫자를 적을 때 일반적인 한자를 쓰는게 아니라 壹, 貳, 參, 肆, 伍, 陸, 柒, 捌, 玖, 拾, 佰, 仟식으로 된 대사숫자大寫數字를 쓴다. 이렇게 쓴 이유는 간단하다. 장부의 조작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정이 관료조직을 통솔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려주는 한 예이다.

주원장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계를 위해 호유용, 남옥사건을 일으키고 그 외에도 수많은 공신과 관료를 숙청해야 했는데 이같은 피비린내나는 과정은 잠재적 찬탈자들의 물리적 제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로서 정부에 반항하는 자들, 혹은 백성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를 심리적으로 통제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기도 하다(물론 홍무제 개인의 성격도 충분히 이에 관여했을 것이다).

때문에 홍무제는 탐관오리를 깔끔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주기보단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 공포심을 느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혹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장을 꺼내놓는것이나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물론이며 가장 심한 것으론 박피실초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탐관오리의 가죽을 벗기고 그 안에 풀을 채워놓는 것으로, 관청 옆에 세워두고 후임자들이 보고 있을 수 있도록 했다.

홍무제는 또한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법률을 제정하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최대한 보급하려 노력했다. 또한 부정부패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를 크게 알려 모두가 따르도록 하려했다. 그리고 도찰원이라는 감사기구를 만들어 왕공부터 최하급 관리까지 감시하고 탄핵할 권한을 주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수많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닥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홍무제는 이를 개탄하여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아침에 탐관오리를 가득 죽이면 저녁에 어떤 자가 또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죽는것도 두렵지 않고 부패를 저지른단 말인가?" 이 지경에 이른다면 형벌이 부족함이 원인이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인가? 명나라 조정은 어째서 이를 뿌리뽑지 못한 것인가?

홍무제 시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중국은 매우 넓다. 그래서 지방에서 걷은 세곡을 중앙으로 옮기는 데에는 많은 손실이 들었으며, 출발지에서 보낸 세곡과 도착지에서 받은 세곡의 양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하는 정도의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때문에 당시 수송을 책임진 관료들은 장부에서 출발지에서 보낸 세곡량을 비워두었다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 도착한 양을 보고 여기에 맞추어 기록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안 홍무제는 크게 분노했고 해당 관료들을 처결하며 더 이상 저러한 관행을 할 수 없도록 막으려 했다. 문제는, 이것은 단순히 관료들이 부패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홍무제가 담당자들을 아무리 강하게 처벌해도 문제가 나아지지 않던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이것이다. 황제가 지고무상의 권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 권력을 휘둘러 할 수 있는건 부패가 확인된 관료들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 고작이었다(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매우 끔찍한 일이었겠지만). 어디까지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디까지가 부패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중앙정부가 법령을 공포하는 것은 그것을 따르게 할 실질적인 방법이 없는 한 단순한 도덕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현대인들은 이 시대 명나라의 체제를 보면서 대체 어째서 대례지의(大禮之議 : 세종 가정제때의 논란으로, 홍치제를 황고皇考로, 흥헌왕興獻王을 황숙부皇叔父로 하는 것이 옳으냐, 흥헌왕을 황고로, 홍치제를 황백고皇伯考로, 정덕제를 황형皇兄으로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있었던 논쟁)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도대체 왜 저런 쓸데 없는 규범이 국가조정을 뒤흔들어야 하는가?

일부 사람들은 단순히 '저러한 유교적 규범이 바로 당시 국가의 정당성 기반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따져보아야 하는것은 대체 저런 규범이 왜 국가를 규율할 정도로 중요시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이다. 정부란 국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기구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조직이지 집안 어르신들을 뭐라 부를지 결정하는 기구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배경에 놓고 보면 문제는 간단하다. 명나라의 조정은 행정적 기반이 너무 취약했던 것이다. 우리는 명나라가 2세기 반동안 상업혁명을 일으키고, 신대륙과 일본 등으로부터 엄청난 귀금속을 얻고, 경제를 유례없이 발전시켜 인구가 증가했음에도 재정수입은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경제의 발전을 조정에서 통합할 방법이 없음을 증명한다.

이 시대 대륙은 단일한 중앙정부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부는 대륙을 일관되게 다스릴 수 없었다. 이것도 사실이다.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중앙은 지방의 모든 권한을 지녔지만 가장 기본적인 재산권의 보장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농민은 부당하게 토지를 침탈당했고 지주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소작농에게 전가했다. 그러나 그 지주들조차 빈곤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명나라엔 1100여개의 현이 있었고 그것이 명나라의 기본 징수 단위가 되었다. 부유한 현은 가난한 현의 몇백배의 세금을 할당받았다. 이러한 세금제도는 실제 현의 경제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반영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한 이유는 조정에서 각 지방의 경제사정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정한 세금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명나라 역사 내내 세금제도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고 미납된 세금을 강압적으로 걷는 것은 도덕적 원칙에 위배되었다. 당시 세금은 가장 가난한 농민을 기준으로 맞춘 셈이고 각 현이 경제상으로 얼마나 부유해졌건, 혹은 얼마나 더 비참해졌건 그것은 조정에서 파악하지 못한다 정하고 아예 포기를 해버렸다. 조정은 일반 농민들이 비참한 기아선상을 해매는 것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할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농민들이 파탄상태에서 벗어난다는 희망을 가지기보단 그저 그런 가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거대한 통치기구를 통해서 대륙을 통합할 수 없었다. 어른을 아이보다 위에 두고 남자를 여자보다 존귀하게 하며 배운 자를 못 배운 자보다 우월하게 두는 유교적 규범은 조정의 행정능력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행정조직에 의해 단일함을 보장받은게 아니라 문화적, 규범적 연속성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제국을 통합하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유교적 규범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홍무연간, 황제는 대지주들과 부유한 자들을 처결하고 명나라를 중소지주들과 자영농의 천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농민을 거주지에서 멀리 나가지 못하게 했고 만약 나가고자 한다면 관청의 허가를 얻도록 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에서 적정한 세금을 걷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그러한 불평등을 제거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오래갈 수가 없었다. 오로지 농본주의 국가를 유지하기에는 이미 농업과 기술이 너무나도 발전해 있었다.

기술상의 발전은 사회상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잉여생산물이 유통되고 상업이 발달하며 때맞추어 금은이 신대륙, 유럽, 일본 등으로부터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명나라의 경제는 가속적으로 발전했다. 초기 홍무제를 제외한다면, 명나라의 정책은 사실 상공업을 통제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정에서 경제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선덕연간에는 황제가 신하들에게 은으로 하사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전하는 상업경제는 결코 자본주의로 이행될 수 없었다. 잉여생산물과 집중된 부는 재투자되어 새로운 부를 창출한 것이 아니라 무가치한 소비를 위해 사용되었다. 신사층과 관료들은 이처럼 농업이 몰락하고 상업이 발전함을 한탄하며 농민들이 토지에 붙어있지 않고 떠돌아다님을 개탄했지만, 한편으로 이 거대한 경제 속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자들이었다. 시장경제는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나 혹은 이에 준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경제를 조절하고 재산권을 보장하며 화폐와 신용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이 없다면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가능하지 않던 것이다.

명조정이 이러한 문제와 모순점들을 완전히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쪽에선 농민들이 굶어죽거나 비참한 기아선상을 해매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한 쪽에선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해 초호화판 생활을 벌이는 신사층과 상인들이 있었다. 조정은 계속해서 세제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가능하다면 이 거대한 상업경제를 조정의 통치와 결합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현재 있는 세금이라도 최대한 공정하게 거두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2세기에 걸쳐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그리고 만력제의 시대에 들어 세재 개혁들이 일조편법이라는 제도로 종합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