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o

로마의 제국화

사회과학
이전에 다른 곳에 투고했던 글을 다듬어 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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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초기엔 왕정으로 시작했다고 추측되나, 7대 왕 타르퀸을 쫒아낸 뒤엔 공화국이 된다. 이 공화국은 분명 전제정은 아니지만 민주정이라 보기엔 다소 독특한 면을 보인다. 공화국의 주권자는 분명히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 : 로마 원로원과 시민)였지만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그 실제적인 운영방식이나, 포함된 정신이 아테네의 그것과는 굉장히 다른 모양을 보인다.

아테네의 경우엔 누구도 참주가 되지 않도록 제어하기 위해서 주요 공무직은 모두 추첨과 같은 제도로 뽑았으며, 또한 거의 유일한 선출직인 10명의 장군들도 계속해서 민회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페리클레스조차 그의 정적들에 의해서 그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민회로 하여금 하도록 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체제는 아테네의 민주제가 어떤 면에선 지독한 통제주의적인 면을 지녔다는것을 말해준다. 아테네는 경쟁을 제한했고, 뛰어난 자들이 등장하여 권력을 잡는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실제로 도편추방제 등으로 추방된 인물들은 거의 아무런 죄도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인것 자체가 이유인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분명 아테네의 민주정을 유지시켜주는데엔 좋은 효과를 내었지만 아테네의 힘을 갉아먹는데에도 뛰어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결국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패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다시 제국을 재건하는 등 나름 중흥은 했지만 어찌되었건 옛 황금시대를 되찾을 수 없었다.

한편 로마는 어떠한가? 로마도 분명 독재자의 출현을 굉장히 경계했다. 로마 공화정엔 비상시를 대비한 독재관(Dictator)이라는 직위가 존재하였고, 집정관 한명의 지목을 통해서 임명될 수 있었지만(그리고 반년의 임기 동안엔 누구도 그 명령에 거역할 수 없었지만), 로마는 정말 중요한 때가 아니면 결코 독재관을 뽑지 않았고, 뽑은 뒤에도 상당한 경계를 보였다. 하지만 로마는 아테네와는 분명 다른 면이 있었다. 로마는 경쟁을 지나치게 제한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이라면 명예를 위하여 공적을 보이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개선식은 로마인이 누릴 수 있던 최고의 영광이었고 개선식이 벌어지는 동안 그 주인공은 신과 동급이 될 수도 있었다(물론 그의 옆에선 '너도 언젠가 죽을 인간임을 기억하라'는 경구를 읊는 노예가 있었지만).

이러한 로마인의 의식은 이후 로마가 패권을 잡는데에도 기여했다. 로마의 지배계급은 그 자신의 의무를 지나치리만큼 충실히 수행했고, 로마의 평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하는것을 결코 용납하지도 않았고,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했다(로마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굴욕은 기록말살형이었다). 이처럼 공화국의 체제는 단순히 공화를 보존하기 위한 통제 위주의 정책이 아니었다. 통제는 존재했으나 공화국은 항상 그 이상의 유연성을 위기 때마다 보여주었다. 로마인들은 일의 균형을 잘 알았고 그에 맞추어서 공화국을 운영했다.

이와같은 공화정의 체제는 삼니움 전쟁에서, 그리고 피로스 전쟁에서 그 능력을 보여주었다. 원로원은 뛰어난 결단력과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고, 그 힘으로 포에니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포에니 전쟁은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결정하는 대전으로써, 로마 공화정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명장중 하나라 평가받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로마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전선에 나간 집정관의 수도 50명이 넘으며 그중 10명 이상이 전사했다. 칸나에 회전에서만도 출전한 원로원 의원 50여명의 대다수가 사망했다. 하지만 로마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자마 회전에서 한니발을 패배시켰으며, 결국 3차 포에니 전쟁때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로마 공화국은 절정의 시대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공화정이 최고조에 오른 그때, 몰락의 기미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로마는 세계의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로마는 지중해 각지에 그 속주를 늘려갔으며, 각지의 속주에선 엄청난 부가 쏟아지고 있었고 이 부는 로마의 최상층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효율적인 라티푼디움에서 쏟아지는 농작물은 이와 대조적으로 중산층을 몰락시켰고, 이에 로마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을 보였다. 부유층 지역엔 수도관을 지나온 물이 흘렀지만 빈민가엔 쓰레기와 분뇨가 넘쳐났고 죽어나간 빈민들은 쓰레기에 그대로 같이 파묻혀서 처리되었다. 이것은 그리스에서도, 로마에서도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던 상황이었다. 노예로 전락하지 않는 이상 시민이 그렇게까지 몰락하는 사건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포에니 이후의 로마에서만 나타나는 괴상한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로마의 무한 레이스에서 실패한 자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로마의 냉혹한 경쟁 체제는 탈락자를 결코 보듬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다시 로마를 포에니 전쟁 이전으로 돌리려 한 것이 그라쿠스 형제이다. 그들은 지나치게 양극화된 사회를 어떻게 해서든 통제해보려 했다. 중산층을 키우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이 제출되었다. 이것은 지나치게 극소수 상층부에 집중된 부를 최대한 아래로 내려보내려는 행동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가 그 상층부에 속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러한 법안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사실상 원로원과의 정치투쟁을 벌여야 했고, 법안을 가결시키기 위해서 민회를 장악하여 원로원에 대항하도록 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모두가 아는 바일 것이다. 로마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사실 하층민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지닌것은 귀족 계급도 마찬가지였다. 리키니우스 법 이후 평민에게도 주요 요직에 진출할 기회가 열렸으며, 로마에선 부모의 업적이 자식에게 계승되지도 않았다. 출생의 특권이 아예 없던건 아니지만, 평민도 그 출중한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얻으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귀족도 몇대 동안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 완전히 잊혀질 수 있었다. 마리우스와 키케로는 평민 계급으로써 각각 군무와 변설로 원로원에 들어갔다. 공화정 초기부터의 뿌리깊던 귀족가문인 율리우스 씨족은 수부라에서 살아야 했다.

로마에서 출세하고자 한다면 명예와 권위를 얻어야 했다. 명예는 언제나 존중되었으며, 뛰어난 공적을 세운 자는 그에 마땅한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로마를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패권국으로 이끄는 힘이었으나, 그 힘은 필연적으로 내부에 제정으로 향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포에니 전쟁 전까지는 극단적으로 계층이 양극화되지도 않았고, 중산층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무장하였기에 장군이 그들을 사병화시킬 위험도 낮았다. 로마 군단은 분명 질서가 있었고 그 충성의 대상은 SPQR이었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중산층은 몰락했고, 양극화의 결과 로마에선 군인의 대상층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수가 얼마되지 않는 최상층만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무장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이런 경쟁에서 낙후하지 않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어렸을때부터 가혹한 교육을 받았다(여유있는 집안일수록 더더욱!). 아이들은 공화국의 미덕에 따른 강인한 육체를 위해서 어렸을때부터 신체를 단련했으며(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법이나 수사학, 그리스 철학 등을 교육받았다. 로마의 가부장적인 시스템도 이러한 경향을 과열시켰다. 아버지는 때에 따라선 가족의 생사여탈권도 쥐고 있었고,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항명하는 사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가혹한 시스템 덕분에 영아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남는 비율은 절반도 되지 못했다(뭐 사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도 있지만 워낙 그 당시의 위생 수준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런 경쟁 시스템의 결과로써 로마는 그야말로 거인이라 칭할만한 사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평민으로써 입지적인 군사 공적을 세운 마리우스, 그리고 그 부관이었지만 마리우스를 뛰어넘은 독재자이자 자칭 행운아(Phelix)이던 술라, 술라의 지지자이자 그 시대를 이끌던 변설가 호르텐시우스, 그를 꺾은 고대 수사학의 완성자 키케로, 로마 최대의 부자였으며 또한 배후의 음모가였던 크라수스, 로마 최고의 장군중 하나였던 폼페이우스,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또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카이사르, 그에 필적하는 가면의 정치가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립파, 이에 대항한 안토니우스 등의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화라는 이념에는 위협이 되었다.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체제이다. 그리고 집정관과 원로원, 속주 총독, 군대의 사령관은 모두 이 공화국이라는 위대한 체제의 부품일 뿐이다. 분명 로마는 지나치게 강력한 자를 견제할망정, 그러한 사람이 받는 명예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화국의 일부로서만 인정되어야 했다. 영웅은 좋은 것이나, 영웅으로서 유지되지 않는 것이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의 어느 순간, 로마인들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체제가 핵심적인 몇명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극단적인 경쟁은 극단적인 양극화를 불러왔다. 극단적인 양극화라는 것은 승리자와 패배자가 극단적으로 나뉜다는 뜻이다. 승리자들은 언제라도 그들이 추락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최상층의 계급들도 계속해서 자신들끼리 경쟁하기 시작했다. 경쟁이 과열될수록 패배자의 운명도 가혹해졌으니, 이러한 경쟁에서의 승리는 원로원에서의 변설로만 될 것이 아니었다. 군대끼리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군대를 장군의 사병으로 만들었으며, 내전으로 향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후 이어지는 내전은 기존의 모든 권위(성역이던 로마, 원로원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술라의 로마 시(市) 점령은 이후 100년간 시작될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내전이 시작되면 경쟁자는 내전의 참가자로 압축된다. 내전은 모든 경쟁자가 합의하거나, 혹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친 단일한 승리자가 등장할때까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도 언제든지 다시 한번 내전이 시작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공화국의 극단적 경쟁시스템은 궁극적으론 오로지 한명의 승리자를 탄생시키게 될 것이었다. 이제 그 승리자가 내전의 종식을 선언했을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겠는가?

첫번째 내전의 승리자인 술라는 스스로가 공화정의 지지자였기도 했고, 공화국을 무너뜨릴 야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 후계자들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술라의 다음 세대의 승리자,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취임함으로써 왕(Rex)으로써의 길을 열어젖혔다. 카이사르가 동방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전제적인 체제를 도입하려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는 암살로 저지되었지만 공화정의 붕괴는 이미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로마의 공화정, 그 자체의 역동적인 힘이 가르키는 방향은 분명했다. 3번째 내전이 종결되었을때, 오로지 단일한 승리자, 위대한 옥타비아누스는 B.C.E 27년, 존엄한 자(Augustus)의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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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긴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았다. 때문에 어째서 내전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뛰어난 판단을 가졌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통해 권위를 획득하고, 개선식을 황제에게만 허용함으로서(황제가 아니면 아무리 잘난 공적을 세웠어도 약식 개선식에만 만족해야 했다) 군인 영웅이 나타나는 것을 견제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데에 혈족을 중시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 어느 정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신격(Divus) 카이사르의 아들로써 스스로 신의 아들이었고, 그 신성성이 피로써 승계된다면 제국의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후 이어지는 네로까지의 황조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라 한다.

로마의 군사 전략도 바뀌었다. 공화정 시기에는 정복이 일상화된 일이었고 장군들은 자신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혹은 부하들의 약탈과 정착을 위하여 계속하여 정복지를 늘여나가야 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를 제거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해적을 토벌했고, 크라수스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정벌에 나섰다. 이러한 전략은 아우구스투스때에 전면적으로 바뀌어 이전의 공격 주의보다는 방어 위주의 전략이 되었다. 라인 강에서부터 도나우 강 하구까지가 제국의 북쪽 국경선으로 바뀌었고, 로마의 군단 기지들은 이 선을 따라 늘어섰다. 비록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에 게르만 공략이 한번 시행되긴 했지만 다음 대의 티베리우스 황제때 로마군은 철수하고 이후 브리튼 섬의 점령 등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영토는 큰 변동 없이 진행되었으며, 공적을 쌓을 기회도 줄어들었다.

제정이 성립된 이후, 경쟁은 부분적으로 제한되었다. 군권은 어찌되었건 황제가 지녔고 이것은 황제의 칭호중 하나인 임페라토르(Imperator)를 통해 증명되었다. 새 황제가 즉위하면 로마의 군단들은 모두 황제를 향해 충성 서약을 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은 공화정에 비해선 뛰어난 인재의 배출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주권자가 아무리 SPQR이라지만 원로원은 황제보다 비중이 낮아졌고, 그저 평화와 안락에 젖게된다. 경쟁의 제한은 초기엔 제한적이었지만 갈수록 심각해졌다. 로마 공화정의 붕괴가 포에니 전쟁의 승리와 패권에서 예상되었듯이 제국의 붕괴는 제정의 전성기이던 피우스 황제때에 예견되었다. 피우스 황제는 5현제의 4번째 황제로써 그의 시대는 정말 무난하고 제국이 잘 돌아가던 시대다. 그는 20년의 치세동안 수도 로마에서 벗어난 일이 거의 없었지만 제국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부에 내포한 위험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홍무제의 문관숙청

중국中國/명明
Prologue

명(明) 홍무(洪武) 12년, 좌승상(左丞相) 호유용(胡惟庸)은 사소한 몇가지 실수(형사사건과 행정과실)로 인해 추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발이라도 맞춘 듯 누군가 나타나서 호유용이 모반했다고 고변했다. 이것이 이른바 '호유용 사건'으로, 조정의 가장 큰 권신이자 중서성(中書省)의 수장이던 호유용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십년간 홍무황제(洪武皇帝)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며 수만 이상이 이에 연루되어 죽어나갈 것이었다.

왕조가 바뀔 때 마다, 혹은 군왕이 바뀔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중국 역사에선 상당히 흔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단연 돋보인다. 호유용 사건과 남옥(藍玉) 사건에 연루되어 개국 공신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태조의 손에 살육되었다. 그리고 그 외의 기간에도 결코 적다할 수 없는 관료들이 탐관오리라 하여 죽어나갔다. 황제의 손에 죽은 자는 적어도 수만, 많이 추산하는 사람은 10만이 넘을거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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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성립된 이래, 봉건시대(封建時代)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천명을 받아 만백성을 통치했다. 황제는 스스로 짐(朕)이라 칭하여 영토와 공간을 지배함을 선언하고 연호(年號)를 정하여 시간조차 의지하에 두었다. 황제의 명령은 칙명(勅命)이라 하여 이를 받는 자는 황제를 대하듯 무릎을 꿇고 천자의 의지를 받들어야 했다. 이처럼 황제는 만인지상의 지고한 위치를 쥐고 절대권력으로 인민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상의 이야기였다. 황제가 아무리 위대해도 현실에는 벽이 있었다. 하늘의 아들이라던 황제들은 종종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제위를 박탈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거대한 중화대륙과 인민들은 통치자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역대 황제들의 고심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발전이라면 역시 송대(宋代)의 문치주의 확립일 것이다. 당대(唐代)까지만 해도 지방에 일일이 관료를 파견하여 다스리는게 어려웠기 때문에 중앙에서 먼 지역에는 현지의 행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는 절도사를 임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방식은 효율적으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중앙 정부에서 다스리는 방식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 절도사들은 얼마 안가 군벌로서 성립하여 중앙정부를 무시할 수준으로 강력해졌으며 결국 이후 당나라는 쇠락의 길로 향했다. 다시 전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왕조를 수립한 송태조 조광윤은 그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절도사들의 군권을 회수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문관집단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른바 사대부로 대표되는 이들 문관집단은 황제의 손발이 되어 중앙에서 지방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 문관들도 항상 황제를 따른 것은 아니다. 군벌시대의 절도사들이 호족의 지지를 받아 군대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다면 이들 관료집단에게는 학문이 곧 무기였다. 이들은 붕당을 형성해 상대를 몰아세웠으며 송대 수백년의 역사 동안 당파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잘 알려졌듯이 주원장은 빈농출신이다. 때문에 당시 농민의 상황을 잘 알았다. 농민은 작은 땅을 일구며 평생 부지런히 일해도 굶주림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관리들은 수탈과 직위보존에만 급급하였고 지주나 유력자들과 얽혀 농민을 착취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주원장은 이들 신사층과 관료들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을 수 밖에 없었다. 일찍이 홍건적은 봉건황조의 개국이 아니라, 명왕출세와 미륵강생을 기반으로 하는 명교-미륵교 의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봉건왕조를 세워 황제가 되자 주원장은 깨달았다. 관료와 지역의 신사층은 제국 통치의 필수요소임을. 봉건제국의 황제는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았으며 제국을 통치하려면 반드시 호족들과 지방유력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를 걷고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게나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세가 너무 적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다. 조세가 불균형하면 국가는 내부로부터 붕괴된다. 때문에 건국자들과 그 후손들이 국체(國體)를 정비할 때는 반드시 조세제도가 포함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세를 균형있게 걷을 수 있는가?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이가 지닌 부(富)와 생산하는(혹은 미래에 생산할)재화(財貨)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양을 걷으면 그것만으로도 균형있게 세금이 분배되므로 호구조사만 제대로 되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에 착안되어 만들어진 것이 중국 북위(北魏) 이래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약 300년간 시행된 균전제(均田制)이다. 한(漢)이 멸망한 이후 농민들이 땅을 잃고 자영농들이 급속히 몰락하는 동안 호족들이 그 땅을 얻어 대토지를 보유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호족들이 대토지는 지니면 농민이 살 땅이 없어진다. 그러면 국가로서는 세금을 걷을 대상과 병역을 지울 대상을 잃게 된다. 또한 호족이 지역의 실권을 잡으면 군주권은 위험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균전제를 통하여 역대 황조들은 최대한 영토를 재분배하려고 노력했다(실효는 의문스럽지만).

원말 농민봉기는 상당수의 몽한 대지주들을 몰락시켰다. 특히나 중원지역과 화북지역은 전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지주계급이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강남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대명의 근거지였던 회서에는 오히려 수많은 신흥 지주가 생겼으며 이들이 초기 대명황조의 지배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은 홍무제에게 껄끄러운 일이었다. 이 빈농출신의 건국황제는 원말명초의 전쟁을 거치면서 회서출신의 호족과 지주의 조력으로 제국을 세웠다. 건국 공신들의 대부분, 그리고 제국 통치 기구의 주요 요직을 이들 회서인들이 차지했다. 이제 황제는 불안해졌다 : 내가 살아있을 때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약한 황태자 주표(朱標)가 저들 회서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공신들이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전횡하는게 아닐까?

황태자가 1392년 4월에 38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먼저 사망하자 어린 황손(주윤문朱允? : 후일의 건문제建文帝)이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었다. 이 황손을 보며 노황제는 결심했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구오지존으로서 황제가 천하의 중심이 되길 바랬으며 누구도 황제에게 대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지녔다. 그러나 그 황제의 통치가 저들 봉건지주들에게 지탱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명나라는 회서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의 나라임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회서인들을 포함한 지주들을 몰락시킨다면 이제 제국을 무엇으로 통치할 것인가? 그것은 과거시험을 거쳐 전국으로부터 뽑힌 관료들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은 긴 공부가 필요한 일이며 그 준비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지주계급,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농은 되어야 했다. 이는 대명이 건립되었던 최초의 과거에서 합격자의 대부분을 (상대적으로 전란이 적어 대지주의 몰락도 없었던) 강남출신들이 차지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맞서 홍무제는 제국 토지의 재분배를 했다. 다만 그것은 옛 북조(北朝)가 썼던 방법보다 훨씬 가혹한 방법을 통해 단기간 내에 이루어졌다. 주원장이 바란 세상은 대지주를 몰살시키고 그 땅을 자영농과 소지주들에게 분배하여 농민의 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강남 지주들은 호유용 사건과 남옥 사건에 연루되어 대규모로 죽어나갔다. 주원장에 의해 재산을 모두 잃고 운남으로 쫒겨나갔다는 강남 최고 부자 심만삼(沈萬三 : 실제 심만삼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죽었다)의 이야기는 실제 당시 강남에 있었던 수많은 지주들이 당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사회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회서인이나 신사층으로부터의 조력이 없이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관이 신사층에서 충당되는 구조는 황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당시의 관료기구의 미비함은 관료들의 인원 충당 뿐 아니라 실제 행정의 집행에서도 신사층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대부분의 문관들은 이에 딱히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명 조정의 행정적 능력과 제도로는 이들 관료들을 충분히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으며, 관료만으로 국가적 정책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

이들 문관 집단은 이중성을 지녔다. 그들은 유학을 배웠으며 어렸을 때부터 이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들의 도덕적 원칙에 충실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이익을 찾아 상인들이 곳곳으로 움직이는걸 한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자기모순으로 상업과 경제의 발전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도 그들 문관이며 신사층이었다. 명대 중기를 넘어서면 이미 대부분의 관료들은 번영하는 상업사회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기도 전에 그가 바랬던 세상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남자는 농사를 하고 여자는 집에서 길쌈하는 시대'는 이미 당시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명나라의 역사는 경제의 놀라울 만한 변화와 이를 어떻게든 쫒아가려 했던 조정의 노력이기도 하다. 흔히 홍무제의 강력한 농본정책으로 인해 명나라가 상공업을 억제하려 했다는 이미지가 정착되어있으나 실제 명나라 조정이 상업의 발전을 엄밀하게 금지하려 했던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명나라는 상업의 발전을 최대한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과 거대한 관료조직이 따라가기엔 대륙의 변화는 너무 빨랐다.

홍무제 사후, 명나라의 황제들은 결국 신사층과 타협하여 그들이 제국의 통치 요소임을 인정했다. 이후 농민의 천국은 사라졌고 잉여생산물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한다. 신사층과 이에 영합한 문관들은 비효율적인 국가제도의 틈과 허술한 행정망을 피해 막대한 재부를 쌓았고 명 조정은 결코 이것을 통제하에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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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명나라가 세워진지 2세기가 흘렀다. 정덕(正德), 가정(嘉靖) 연간을 거치며 명조의 재정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은 토지대장에서 빠지는 전토가 늘어나고 자영농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주요 문제로 지적했다. 부호들이 은닉한 토지를 찾기 위해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 측량을 시작했고 이로서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시행될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사층과 부호, 지주들의 반발은 강력했다. 장거정은 사후 관료들에 의해 탄핵당했고 그의 개혁은 후퇴했다. 만력 12년에 장거정의 죄상이 공표되었다. 이후 내각대학사에 임명된 신시행(申時行)은 문관집단의 수복에 들어갔다.

문관들은 이제야 황제를 그들이 원한 도덕율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관들의 도덕은 행정과 기술, 원칙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제국을 유지해주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문관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신시행은 만력제를 설득하여 장거정이 시행했던 효율성 위주의 행정방식을 폐기하고 전례없이 3대 중요부서인 이부, 도찰원, 한림원의 관리를 유임시키는데에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황제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당시 내각대학사 신시행이 문관의 편을 들며 황제를 제약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황제와 문관 집단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했으며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는데에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벌어지고만 있었다. 황태자 책봉 문제에서 보여진 문관과 황제의 의견충돌은 이후 명나라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처럼 문관집단의 반발에도 부룩하고 만력제는 그의 선조였던 홍무제처럼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할 수도 없었으며 영락제(永樂帝)처럼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치제(弘治帝)처럼 문관들과 조화하는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서 소심하게 자랐으며 항상 제국의 후계자로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만력제는 죽을 때 까지 그의 정신에 가해진 금제를 헤어나지 못했다. 황태자의 책봉문제에서 황제가 보인 태도는 졸렬하기까지 했다.

만력 15(1587)년, 신시행은 요동순무가 보낸 참정의 탄핵안을 처리 해야 했다. 요동순무는 건주위(建州衛)의 추장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주변 부족을 통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우환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출병하고자 했으나 부하인 개원도참정(開原道參政)이 유화책을 주장하며 군대의 출동을 거절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정을 탄핵하는 순무의 상주가 북경에 도착하자 감찰관들은 오히려 참정의 사적 주장이 옳다하며 순무를 탄핵했다. 신시행은 여기서도 그 특유의 유화적인 방안을 내놓아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사소한 일로 문무의 불화를 야기하지 않는게 상책이라 판단한 신시행은 서로가 탄핵했으니 이 일은 더이상 거론치 않는것이 옳다고 황제에게 상주했다.

이전 몽골에 대한 처리에서도 그랬듯이 문관들은 무관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유화책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만약 신시행이 조금 더 이 일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는 당시 만주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건주위의 추장,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이름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간수의 법칙. Zimbardo, 1971

사회과학/심리학
이전에 깨진 유리창의 법칙에서도 지적했듯이 사람은 환경에 따라 태도와 행동이 바뀐다. 짐바르도는 이에 더 나아가서 보다 다양한 환경을 만들고 이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이 바뀌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실험목적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도소는 참으로 비인간적인 환경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감옥은 왜 그렇게 험악한 환경인가? 범죄자가 가는 곳이라서 험악한 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가? 아니면 환경이 사람을 그처럼 험악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직접적인 환경은 사람의 행동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것인가?

실험방법

실험자들은 대학의 심리학 건물 지하에 가짜 감옥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복도에 10미터짜리 섹션을 구획하여 조립식 벽으로 감방을 만들었다. 실험실을 개조하여 가로 약 2미터, 세로 3미터의 조그마한 감방 세 개를 만들어 쇠창살을 달고 검은 색 칠을 한 문을 만들어 달았다. 또한 벽장을 처벌 독방으로 만들었다.

이 감옥에 들어갈 사람들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간수로서 책임지고 감옥의 질서를 지키는 자들이다. 다른 한 쪽은 죄수로서 간수들에 의해 구금되며 통제당하는 자들이다.

참여자들은 지역 신문의 광고(미국에선 심리실험의 참여자들을 이런 식으로 모집하는 일이 자주 있다)를 통해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지원자 75명 중 심리테스트를 통해 보다 정상적이고 건전하다 판단되는 21명을 선발했다.

이들 중 무작위로 뽑힌 절반이 간수가 되었다. 그들에겐 제복과 검은 안경이 배당되었다. 남은 절반은 죄수가 되었다. 짐바르도는 팔로 알토(샌프란시스코 실리콘 밸리의 부촌) 경찰서의 경찰관들에게 이들을 각자의 집에서 '체포'하여 수갑을 채우고 경찰서로 연행하게 했다. 그런 다음 엉터리 죄목을 씌우고 눈을 가린 채 심리학부 지하실에 있는 감방으로 데려왔다. 그 다음에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수인 번호가 앞귀로 적힌 죄수복을 입혔다. 이 죄수복은 구금되어 있는 동안 그들을 식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관찰자들은 이후 약 2주간 이 가상의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할 것이다.

실험결과

엄밀히 말해 이 실험은 제대로 끝마쳐지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험은 어디까지나 실험으로 끝나야 하며 실험실 바깥으로 나가면 바로 이전과의 연계가 끊어져야 했다. 특히나 실험자들은 결코 심리 실험에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그들은 방관자로서 실험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험은 어느 순간 실험실을 벗어났다.

간수들 중 일부는 이전에 자신을 평화주의자로 자처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단시간에 혹독한 감독관의 역할에 빠져들었다.

첫날 밤 그들은 새벽 2시에 죄수들을 깨워서 팔굽혀펴기를 시키고 벽에 일렬로 정렬시킨 다음 다른 과업을 수행시켰다. 이튿날 아침 죄수들이 자신들의 번호를 찢어내고 감방 안에 바리케이트를 치며 반발하자, 간수들은 그들을 발가벗겨 소방전을 뿌렸으며 반란의 지도자를 독방에 처넣었다.

"우리는 종종 권력을 남용했죠. 예를 들면 그들의 면전에서 고함을 질렀거든요."

간수 중 한 사람이 회상했다.

"그건 완전히 공포 분위기였어요."

실험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간수들은 조직적으로 점점 더 잔인하고 가학적이 되었다.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은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변화의 강도와 속도였습니다."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도록 시키고 수갑을 채우고 머리에 종이 봉투를 뒤집어씌운 채 복도를 행진하도록 시켰다.

또 다른 간수는 회상했다.

"지금의 내 행동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어요. 난 적극적으로 잔인한 것들을 고안해냈던 것 같습니다."

서른여섯 시간이 지나고 난 뒤 한 죄수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 곧 석방시켜야만 했다. 그 뒤 '극도의 정서적인 우울증 증세인 울음과 분노와 격렬한 불안' 등으로 4명 이상이 석방되었다(이들은 실험참여비도 받지 않고 떠났다).

짐바르도는 원래 이 실험을 2주간 계속하려고 의도했었다. 그러나 그는 엿새 만에 실험을 중단했다.

실험이 끝나고 난 뒤 한 죄수는 말했다.

"이제야 저는 '내 머릿속에 있는 게 나야'라고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죄수로서의 제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다른 죄수는 말했다.

"저는 그때까지 '이게 나야'라고 불렀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 감옥에 자원해서 나를 집어넣은 사람(왜냐하면 그것이 감옥이었고 아직까지도 내개는 감옥이니까요. 난 그게 실험이라고나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은 나와는 전혀 별개였으며, 마침내 내가 그 사람이 전혀 아닐 때까지 나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나는 그저 416번 이었어요. 내가 바로 그 숫자였고, 사실상 416번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있더군요."

갈수록 교도소 내의 상황이 격해지자 실험자들은 수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논했다. 이 때 문을 열고 들어온 다른 실험자가 말했다.

'자네들 뭐하는거야? 이게 무슨 실험이지? 목적이 바뀌었나?'

그 순간 실험실 내의 실험자들은 깨달았다.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해야 할 자신들조차도 본래 실험의 목적을 잊고 가혹한 조치들을 당연시 여기고 있던 것이다. 짐바르도는 우리의 내적 기질은 특정한 상황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짐바르도가 말하는 상황이란 우리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다.

다시 말해 부모가 우리를 키운 것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가 다닌 학교가 어떤 종류의 학교인지, 우리 친구들이 어떤 사람인지, 또는 우리 이웃이 우리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같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의 요점은 훌륭한 학교와 행복한 가정과 좋은 이웃 출신인 정상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단지 그들이 처한 상황의 세부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약간만 변화시키는 것으로도 그들의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