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o

'사회과학/철학'에 해당되는 글 3건

  1. 철학적 질문?
  2. 자유와 질서
  3. 맹자 순자의 성선·성악설

철학적 질문?

사회과학/철학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선생이 교실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무인도에서 나무가 쓰러졌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모르고 알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쓰러진걸 쓰러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학생들이 열심히 철학적인 토론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쓰러졌다'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定義 : definition)했는지가 곧 답이다. 요컨데 '그것을 인지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쓰러졌다'라는 기표(記標) 안에 정보로서 삽입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쓰러졌다'라는 단어는 상황의 모든 정보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두고 쓸모없는 토론이 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시에 이에 대해 미리 정의하면 의미없는 토론이 없을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필요로 할 일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심술굳은 선생이나 멍청한 철학자가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지만 않는다면 일상생활에서 인지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말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언어란건 정보의 전달이 목적이며 가급적 간결할수록 좋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의미를 무한히 확장해나가다간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하는 법을 키우자는것은 좋다. 그러나 생각을 해도 무작정 아무렇게나 한다고 해서 훈련이 되는게 아니다. 생각에도 절차가 있고 방법이 있다. 아무런 의미없이 토론하게 하는것으로 사고가 유연해질거라 보는것은 아무렇게나 운동하면 몸이 강해질거라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일이다.

자유와 질서

사회과학/철학
자유라는 말은 흔히 통제와 반대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요컨데 자유는 오로지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으며 통제로부터 벗어나야만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길거리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하려면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이를테면 행인을 습격하는 강도라던)가 제거되어야만 한다. 자유는 방치함에서 탄생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자유라는 말은 '누군가(혹은 무엇인가)'가 구속받지 않음을 의미하며, 여기서 그 누군가는 곧 주체(주관:主觀)이다. 정치사상이나 사회학에서 그 주체는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보면 자유는 인간의 본성(마음)대로 행동함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요컨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마음이 규정한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 곧 자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결코 무질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단어의 기의가 곧 엔트로피의 특정 방향으로의 역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작동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 유기체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이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설계도에 쓰여진 대로(질서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자유와 통제는 상충하는게 아니라 완벽한 동일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통제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통제나 절제가 방향이 잘못되어 필요하지 않은 곳에 적용되었거나 혹은 본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으나 결과가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맨 처음의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인을 습격하는 강도의 통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법자가 처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통제당한다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도 해를 당할 수 있고 자기가 남을 해입힐 수도 있는 사회보다는 자기도 당하지 않고 자기가 남을 당하게 할 수도 없는 사회를 더 선호한다(당연하게도 내전중인 국가나 무정부상태인 국가는 여행이나 이민에서 기피 대상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행자의 통행을 막거나 집에서 나서지 못하게 한다면 이 경우엔 대부분의 사람이 반발하며, 자신들의 당연한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느끼며 답답해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를테면 먹고 살 길)이 막힌다면 그저 답답해 하는 수준을 넘어서 국가와 사회를 적대하기까지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다. 결국 자유는 인간이 하려고 하는 것을 하게 해주는 것이며 그러지 않으려는 것을 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이 그저 '사회엔 질서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필요하지도 않고 비용만 들며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는 통제를 강요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회엔 질서와 통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질서와 어떠한 종류의 통제도 허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맹자 순자의 성선·성악설

사회과학/철학
제목을 써놓고 보니 웬지 좀 이상한 촌티가 나는데 왜 이럴까요 (..)

여튼 가끔 나오는 떡밥인지라 한번 써봅니다.


흔히 많은 사람은 성선설은 맹자孟子에 의해, 그리고 성악설은 순자에 의해 제창되었다고 보고있는데... 이러한 의견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나 아주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건 뭐랄까.. 명칭이 실체를 왜곡시키는 경우랄까요? 성선설이라던가 성악설일는건 말 그대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혹은 악하다 라는 설에 대해 말하는 것 처럼 들리니까요.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분명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있긴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먼저 이해해야 하는것은 이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의함이 자연주의라거나 인본주의라거나 하는 사상이 중심이 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가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사상의 주요한 특징은 치도(治道)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림治은 통제한다거나 명령한다거나 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크게 평천하(平天下)..라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치도라 함은 결국 인치(人治 : 사람에 의한 다스림)이며 동시에 치인(治人 : 사람을 다스림)이지요.

현 세태에 문제가 있으면 그 세태를 보다 '좋은'상태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사상적 논의는 이미 춘추시대부터 활발하게 제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옛 춘추시대의 사상이나 통치론들이 정작 현실의 개선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게 분명해지면서 단순히 사상적 문제를 넘어 이것을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접목시킬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지요. 인간을 특정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하려면 그 인간의 본성이 어떤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면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장자壯子 중에 보면 '혀가 맛있는 것을 찾고 눈이 아름다운 것을 쫒으며 손이 부드러운 것을 만지고자 하는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네놈은 무엇을 안다고 이에 반反할 것을 지껄이느냐?'라면서 공자에게 설교하는 도적이 나오지요(이야기중의 공자는 혼비백산해서 도망갑니다. -_-a).

맹자와 순자의 성선, 성악설도 본래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우선 맹자는 공자의 인仁 사상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공자는 인仁은 곧 애(愛 : 사랑)라고 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연스레 생기는 정, 특히 친육에 생기는 서로의 애愛를 사회에 반영할 것을 주장했다. 맹자는 공자의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서 자연스러운 인간 사이의 친애親愛를 사회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이 묵가의 차별없는 인애人愛와 같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혈육에게나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나 같은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묵가의 주장에 맹자의 반응은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놈'이었죠(이거 제가 과장한게 아니라 정말 맹자에 저렇게 나와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은 가까운 사람들(특히 부모와 자식)부터 시작해서 차등적으로 사람을 대할 수 밖에 없다는게 맹자의 주장이었죠. 지금 이 순간에서도 어디선가는 죽어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걸 모두 애도하지는 않듯이.

(약간 벗어난 이야기지만 유가에서 효孝를 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라도 혈육이 가장 가깝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게 부모자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가장 가까운 부모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자라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제대로 형성할 수 없으니 결국 천하에 사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전제조차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맹자의 주장을 인간이 대책없이 착한 존재라 말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맹자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집니다. 맹자는 전국시대 중기라는 시대에 산 사람이고 음모가 난무하는 궁중에서 지낸 적이 있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맹자는 인간이 착하기만 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며, 인간의 본성에는 당연히 악하게 흐를 욕망도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맹자가 주장한것은 인간은 '바른 방향으로 자랄 수 있는 씨앗'이 내재되어 있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일종의 가능성에 가깝지요. 당연히 커갈수록 이러한 가능성들은 파괴되거나 왜곡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이것을 바탕으로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라 하여 성선설을 인의설人義說로 발전시켰고, 나아가 정치에 이를 접목하여 왕도王道정치를 제창했다. 군왕은 이러한 인간본성人心에 입각하여 다스려야 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하면서 도덕을 가르쳐야 한다는 등 철저한 민본주의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의 명칭이 성선설로 굳어지면서 이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정해집니다. 후대에 이르러 이름名이 몸實을 비틀어버린 것이랄까요.


맹자를 보았으니 이번엔 순자를 보아야겠지요. 순자는 '사람의 성性은 악하며 선한 것은 위爲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성性은 인간이 유전적, 생물학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을 말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졸리면 잠자리를 찾고, 색을 알면 이성을 찾고, 추우면 입을 것을 찾는 이러한 본성은 도덕이라거나 인이라거나 예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인간이라도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순자는 이것 자체가 명백한 악惡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흔히 사회적으로 말하는 악함의 방향으로 작용하기 쉽다는 것을 주장한 것에 가깝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이득을 좋아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쟁탈이 생긴다.'에서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요. 누구나 먹고 싶어하고 누구나 호화로운 집을 원하지만 모두가 그런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쟁탈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지요.

순자의 이에 대한 해결책은 교육입니다. '선한 것은 위爲이다.'에서 잘 드러나지요. 위爲라는건 인위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태어나서부터의 본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을 통하여 그 선함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 쯤 되면 순자와 맹자의 주장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를 사랑하고 결혼하면 처자를 사랑한다'는 맹자의 글은 '색을 알면 여자를 찾는다'는 순자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실 맹자와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어디까지나 평천하를 위한 학문으로 논한 것이며 그들의 주장은 이것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