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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제국의 몰락 (2)

중국中國/명明
장거정張居正은 중국 4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5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이미 진사가 되었다. 이 시기는 명나라가 건국되고 이미 150년이 흐른 때로, 제국의 많은 부분에서 노화와 병폐가 쌓여가고 있었다. 장거정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가 되자 『진육사소(陳六事疏)』라는 행정개혁에 관한 글을 지어 황제에게 올렸다.

① 공론을 줄일 것. 곧 모든 일에 헛된 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도록 한다.
② 기강을 잡을 것. 곧 관직의 수여와 형벌을 공명정대하게 하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서는 안 된다.
③ 명령을 중시할 것. 곧 조정의 교지나 칙명이 잘 행해지도록 한다.
④ 명실상부할 것. 곧 인재를 신중히 헤아려 작위나 상을 내리고 이부에서는 관리를 성실히 고과하여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도록 한다.
⑤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 곧 나라의 풍속이 사치스럽고, 재부와 권력이 균등히 배분되지 않고 편중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이러한 작태를 청사하도록 한다.
⑥ 군비를 바로 갖출 것. 곧 군사와 변방의 관리를 정선하고 훈련을 강화하며, 군의 기강과 군비 확충에 주력하면 국방은 저절로 공고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후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어떤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될 것인지 알려주는 서막이었다. 융경제가 서거하고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장거정은 사실상의 독재를 확립하고 강력한 권한으로 개혁을 시행해 나갔다. 장거정은 국고를 튼튼하게 하고 재정을 강화하는 한편, 기존까지 행정적 효율성이 결여되어 있던 관료기구에도 손을 대어 성과 위주의 인사제도를 채택했다.

장거정은 우선 관료들의 효율성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관료조직은 과거로 인해 뽑혔지만 그들을 유지하는 것은 인맥과 친분, 그리고 도덕상의 규율이 주였다. 때문에 그 효율성은 심각하게 낮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장거정의 시대에 들어와 고과(考課)를 평가하기 위한 고성법考成法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통하여 관료조직의 효율성은 향상되었고 미납된 세금도 제대로 걷히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장거정은 몽골인과 무역을 재개하여 불만을 없애 남침을 줄였고, 동북지방은 건주위를 정벌하여 저항의 싹을 없앴으며, 서남의 좡족도 평정하는 등 제국의 외환을 없애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군사적 성과를 넘어서 명나라의 군조직 자체를 개선하여 이루어진 성과로, 군사훈련의 강화와 장교의 질 향상, 그리고 만리장성의 보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그의 최고 업적은 전국적인 측량과 일조편법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세입은 토지 위주였으나 정작 그 토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향신鄕紳들은 소유한 땅을 은닉하는 일이 다수였고 부과되는 세금도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장거정은 양세법을 폐기하고 일조편법을 시행하여 세금을 일원화하는 한편 이렇게 은닉된 토지를 대규모로 적발해내어 정부의 수입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거정의 개혁은 신사층과 부호, 지주들의 거대하고도 심대한 반발을 불러왔다. 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은 관료조직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신사층과 부호는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에 분노했다. 결국 장거정은 사후 관료들에 의해 탄핵당했고 그의 개혁은 후퇴했다. 만력 12년에 장거정의 죄상이 공표되었다. 이후 내각대학사에 임명된 신시행(申時行)은 문관집단의 수복에 들어갔다.

이 사건에 대해서 장거정이 잘났고 관료들이 잘못했다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장거정의 시대에 있었던 개혁들이 당시 관료집단의 인식에서 가능한 일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당시 문관들의 도덕은 행정과 기술, 원칙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제국을 유지해주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다. 효율은 재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정부가 만약 이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강력한 행정조직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방대한 관료집단과 봉건제도를 타파해야만 가능한 영역이었다.

당시 행정효율을 보기 위해서 장거정이 일조편법의 시범 케이스로 지정한 복건성을 예로 들어보자. 장거정은 이곳을 시작으로 해서 제국 전체의 세제를 재편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만력 6년에 복건성의 인구를 대대적으로 조사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황당하게 나온다. 홍무26년(1393년)의 전국인구조사시에 복건성은 81만5천여호(戶)에 391만6천여구(口)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난후에 이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은 겨우 51만5천여호, 173만8천여구에 불과하였다. 몇대가 내려온 다음에 호구가 오히려 60%정도 수준으로 감소된 것이다.

물론 정말 인구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재고해보건데, 그보다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은 조정이 그 지역의 인구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이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조직은 실제 업무보다는 도덕적 원칙에 의해 뽑혔고, 그 도덕적 원칙과 규범이 곧 제국을 통합하는 열쇠였으며 관료조직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이 도덕적 힘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명나라의 사회는 도덕적 원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게다가 그 도덕적 원칙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 황태자 책봉의 문제에 얽힌 만력제는 관료집단에 크게 분노하여 파업(이라기보단 가출에 가까운 행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중심 축을 잃은 문관집단과 황제 사이의 균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장거정의 개혁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명나라의 재정도 위태해졌다. 만력 3대정에 이르러 재정이 크게 부족해지자 황제는 전국에 환관을 파견하여 은광을 개발하고 무분별하게 세금을 걷어 문제를 타개하려고 했다. 이것은 명나라의 사회 균열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았다. 지배계층도 동요하기 시작했고 균열이 발생했다. 동림당東林黨이 탄생한 것이다.

만력제는 그의 선조였던 홍무제처럼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할 수도 없었으며 영락제(永樂帝)처럼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치제(弘治帝)처럼 문관들과 조화하는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서 소심하게 자랐으며 항상 제국의 후계자로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만력제는 죽을 때 까지 그의 정신에 가해진 금제를 헤어나지 못했다. 황태자의 책봉문제에서 황제가 보인 태도는 졸렬하기까지 했다.

만력황제가 죽고 난 뒤 이제 명나라는 도덕적 윤리규범의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만력 3정은 끝났지만 재정은 고갈되어있었고 만주족이 다시 발흥하였으며 민란도 거세어졌다. 이러한 양쪽의 적에 맞서서 제국은 군비를 확충하고 군대를 증원해야 했지만 이것은 명나라의 행정적 취약점을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북경이 함락된 1644년까지 군사들에게 지불되지 못한 급료만 해도 백은 수백만냥에 달했다. 호부에서는 재정 초과분을 평균하여 각 현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빈곤한 현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1632년에 지방정부의 기운(起運 : 중앙정부나 주둔군에게 수송하는 물품)체납율은 이미 50%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각 현의 내부적으로도 세금은 모든 납세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나마 일부 부유한 납세자들은 세금감면특권을 사용하여 빠져나가고 저소득 토지소유자들에게 전가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조편법에 의해 세금은 은으로 일원화되어 거두어졌다. 그 은의 대부분(약 2000만냥) 강남의 부유한 현에서 거두어졌고 그 중에 북경과 변방의 군대에 지급되는 양이 500만 냥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된 경제 순환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지급받은 지역은 강남에 비해 빈곤한 지역이었으며 때문에 이를 남방에서 생산된 면화와 면포 등의 구매에 사용되어 다시 남방으로 회수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회수 장치도 고장난다. 북방과 변경에 투입된 은이 회수되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고 은이 있어도 군비를 갖출 수가 없었다. 1619년 요양遼陽에서는 은을 가지고도 의류를 구입하지 못해 내의 없이 맨몸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있었다. 그나마 보내진 은들은 지휘관에 의해 착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력 연간은 명나라 역사의 전환점이다. 한세기 반에 걸쳐 축적된 모순들은 이 시기에 폭발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 문제에 직면하여 도전했고, 실패했다. 이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 대제국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엄청난 부가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었으며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군대가 곳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들이 굶주림을 참지 못해 민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물론 먹을 것이 있었다 해도) 자국의 촌락과 도시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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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가 자살하고 그 시체가 식기도 전에 이자성의 대순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처음 북경의 민중들은 그들을 환영했으나 이내 반란군들은 본색을 드러내 약탈을 시작했다. 대순군이 40여일 동안 북경에 있으면서 약탈한 재화는 백은만으로 3700만냥에 달했다. 오삼계와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패배한 농민군은 수레에 가득 재화를 담고 도주했다.

만력제가 죽고 아직 나이든 노인들이 그 장엄한 장례식을 기억하고 있을 때, 북경에 만청의 군대가 들어왔다. 이들도 명나라의 체제를 물려받았으며 과거시험을 시행했고, 도덕적 원칙으로 제국을 유지하였다. 강희, 옹정, 건륭에 걸친 강건성세를 거치면서 부유해진 청제국은 자신감에 넘쳐 탄정입무를 선언하였다. 청 조정은 잉여생산물을 거두어 그것으로 재투자한다는 생각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후로 조세는 오로지 토지에 부과되었고 사람에게 부과되지 않았다. 호구조사를 피할 필요가 없으니 전국적으로 정부장악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장거정의 시대로부터 200년이 흐른 후인 청나라 도광14년(1834년), 복건성은 여전히 재난이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었다. 그런데, 이 때의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의 인구는 1500여만으로 급격히 불어난다. 200년전보다 9배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호구도 마찬가지로 7배가량 늘어나서, 전국인구는 놀라운 수준인 4억900만에 이르게 된다.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인구의 증가를 태평성세의 증거라며 자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