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o

대명제국의 몰락 (1)

중국中國/명明
지난 17년동안 숭정제는 어떻게 해서든 왕조의 몰락을 막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지난 세기동안 쌓여온 모순은 마치 운명과도 같이 명나라와 황제를 덮쳤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일어날 일이라기보단 이미 일어난 일과 같이 느껴졌다.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대순大順 농민반란군은 북경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2월에 대순군의 격문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자신만만한 이자성은 3월 15일까지는 북경에 도착할 것임을 천명했다.

황제는 급히 오삼계에게 근왕을 명령하려 했지만 이에 필요한 군자금조차 부족했다. 당시 호부에 남은 돈은 40만냥에 불과했다. 절박해진 숭정은 신하들에게 가진 재산의 일부라도 기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집안이 힘들다 말하며 최대한 이를 회피하려고 했다. 어떤 자는 50만냥의 재산이 있었지만 기껏해야 3천냥만 기부했을 뿐이었으며, 12만냥을 지닌 환관이 1만냥을 내놓은 것은 대단한 편에 속했다. 100만냥의 군자금이 필요했지만 모인 돈은 턱없이 20만냥 뿐이었다.

3월 17일에 대순군은 이미 제국의 심장부까지 도달했다. 황궁에까지도 전쟁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회도 열리지 않았으며 어느 문무백관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친히 종을 울려 백관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태감이 홀로 있는 황제를 보고 놀라 다가왔다. '이미 내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황상께서는 속히 떠나십시오', '대영병은 어디있는가?' '대영병은 이미 흩어졌습니다.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말을 마친 태감도 급히 몸을 돌려 도망갔다.

그가 즉위하기 전, 전대의 황제인 천계제는 17살난 다섯째 동생 주유검朱由檢을 불렀다. "다섯째 동생은 요순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 이 최후의 황제는 느꼈다. 대명왕조는 이미 끝났음을. 이제 그는 남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황제는 황후비빈들을 불러 스스로 정리하게 하였다. 어떤 이들은 통곡하고 어떤 이들은 허리띠를 풀러 자진하였다. 15세의 공주는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숭정도 비통을 금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말했다. '너는 어쩐 일로 우리 집안에 태어난 것이냐?' 그는 말을 마치고 왼손으로 얼굴을 가린체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이후 아직 숨이 붙어있는 비빈들을 내려친 황제는 매산煤山(혹은 만세산萬歲山)에 올라가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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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중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진한 황제라면 누가 뭐라 해도 홍무제가 제일로 꼽힐 것이다. 명대에 이르려 조정은 대륙 전체를 통괄할 행정체계를 마련하려 했으며 그 덕분에 명나라는 중앙이 전국 각지의 수많은 현의 임명권과 그들의 급료 인상분까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과 비교하면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명나라가 관료체계가 발달했다고는 하나 이것은 명분상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 중앙정부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숫자를 한자로 적을 때, 一, 二, 三, 四, 五, 六, 八, 九, 百, 千라고 한다. 그러나 회계에서는 숫자를 적을 때 일반적인 한자를 쓰는게 아니라 壹, 貳, 參, 肆, 伍, 陸, 柒, 捌, 玖, 拾, 佰, 仟식으로 된 대사숫자大寫數字를 쓴다. 이렇게 쓴 이유는 간단하다. 장부의 조작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정이 관료조직을 통솔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려주는 한 예이다.

주원장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계를 위해 호유용, 남옥사건을 일으키고 그 외에도 수많은 공신과 관료를 숙청해야 했는데 이같은 피비린내나는 과정은 잠재적 찬탈자들의 물리적 제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로서 정부에 반항하는 자들, 혹은 백성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를 심리적으로 통제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기도 하다(물론 홍무제 개인의 성격도 충분히 이에 관여했을 것이다).

때문에 홍무제는 탐관오리를 깔끔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주기보단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 공포심을 느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혹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장을 꺼내놓는것이나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물론이며 가장 심한 것으론 박피실초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탐관오리의 가죽을 벗기고 그 안에 풀을 채워놓는 것으로, 관청 옆에 세워두고 후임자들이 보고 있을 수 있도록 했다.

홍무제는 또한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법률을 제정하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최대한 보급하려 노력했다. 또한 부정부패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를 크게 알려 모두가 따르도록 하려했다. 그리고 도찰원이라는 감사기구를 만들어 왕공부터 최하급 관리까지 감시하고 탄핵할 권한을 주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수많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닥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홍무제는 이를 개탄하여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아침에 탐관오리를 가득 죽이면 저녁에 어떤 자가 또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죽는것도 두렵지 않고 부패를 저지른단 말인가?" 이 지경에 이른다면 형벌이 부족함이 원인이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인가? 명나라 조정은 어째서 이를 뿌리뽑지 못한 것인가?

홍무제 시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중국은 매우 넓다. 그래서 지방에서 걷은 세곡을 중앙으로 옮기는 데에는 많은 손실이 들었으며, 출발지에서 보낸 세곡과 도착지에서 받은 세곡의 양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하는 정도의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때문에 당시 수송을 책임진 관료들은 장부에서 출발지에서 보낸 세곡량을 비워두었다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 도착한 양을 보고 여기에 맞추어 기록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안 홍무제는 크게 분노했고 해당 관료들을 처결하며 더 이상 저러한 관행을 할 수 없도록 막으려 했다. 문제는, 이것은 단순히 관료들이 부패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홍무제가 담당자들을 아무리 강하게 처벌해도 문제가 나아지지 않던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이것이다. 황제가 지고무상의 권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 권력을 휘둘러 할 수 있는건 부패가 확인된 관료들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 고작이었다(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매우 끔찍한 일이었겠지만). 어디까지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디까지가 부패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중앙정부가 법령을 공포하는 것은 그것을 따르게 할 실질적인 방법이 없는 한 단순한 도덕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현대인들은 이 시대 명나라의 체제를 보면서 대체 어째서 대례지의(大禮之議 : 세종 가정제때의 논란으로, 홍치제를 황고皇考로, 흥헌왕興獻王을 황숙부皇叔父로 하는 것이 옳으냐, 흥헌왕을 황고로, 홍치제를 황백고皇伯考로, 정덕제를 황형皇兄으로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있었던 논쟁)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도대체 왜 저런 쓸데 없는 규범이 국가조정을 뒤흔들어야 하는가?

일부 사람들은 단순히 '저러한 유교적 규범이 바로 당시 국가의 정당성 기반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따져보아야 하는것은 대체 저런 규범이 왜 국가를 규율할 정도로 중요시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이다. 정부란 국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기구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조직이지 집안 어르신들을 뭐라 부를지 결정하는 기구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배경에 놓고 보면 문제는 간단하다. 명나라의 조정은 행정적 기반이 너무 취약했던 것이다. 우리는 명나라가 2세기 반동안 상업혁명을 일으키고, 신대륙과 일본 등으로부터 엄청난 귀금속을 얻고, 경제를 유례없이 발전시켜 인구가 증가했음에도 재정수입은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경제의 발전을 조정에서 통합할 방법이 없음을 증명한다.

이 시대 대륙은 단일한 중앙정부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부는 대륙을 일관되게 다스릴 수 없었다. 이것도 사실이다.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중앙은 지방의 모든 권한을 지녔지만 가장 기본적인 재산권의 보장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농민은 부당하게 토지를 침탈당했고 지주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소작농에게 전가했다. 그러나 그 지주들조차 빈곤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명나라엔 1100여개의 현이 있었고 그것이 명나라의 기본 징수 단위가 되었다. 부유한 현은 가난한 현의 몇백배의 세금을 할당받았다. 이러한 세금제도는 실제 현의 경제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반영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한 이유는 조정에서 각 지방의 경제사정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정한 세금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명나라 역사 내내 세금제도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고 미납된 세금을 강압적으로 걷는 것은 도덕적 원칙에 위배되었다. 당시 세금은 가장 가난한 농민을 기준으로 맞춘 셈이고 각 현이 경제상으로 얼마나 부유해졌건, 혹은 얼마나 더 비참해졌건 그것은 조정에서 파악하지 못한다 정하고 아예 포기를 해버렸다. 조정은 일반 농민들이 비참한 기아선상을 해매는 것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할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농민들이 파탄상태에서 벗어난다는 희망을 가지기보단 그저 그런 가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거대한 통치기구를 통해서 대륙을 통합할 수 없었다. 어른을 아이보다 위에 두고 남자를 여자보다 존귀하게 하며 배운 자를 못 배운 자보다 우월하게 두는 유교적 규범은 조정의 행정능력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행정조직에 의해 단일함을 보장받은게 아니라 문화적, 규범적 연속성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제국을 통합하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유교적 규범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홍무연간, 황제는 대지주들과 부유한 자들을 처결하고 명나라를 중소지주들과 자영농의 천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농민을 거주지에서 멀리 나가지 못하게 했고 만약 나가고자 한다면 관청의 허가를 얻도록 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에서 적정한 세금을 걷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그러한 불평등을 제거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오래갈 수가 없었다. 오로지 농본주의 국가를 유지하기에는 이미 농업과 기술이 너무나도 발전해 있었다.

기술상의 발전은 사회상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잉여생산물이 유통되고 상업이 발달하며 때맞추어 금은이 신대륙, 유럽, 일본 등으로부터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명나라의 경제는 가속적으로 발전했다. 초기 홍무제를 제외한다면, 명나라의 정책은 사실 상공업을 통제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정에서 경제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선덕연간에는 황제가 신하들에게 은으로 하사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전하는 상업경제는 결코 자본주의로 이행될 수 없었다. 잉여생산물과 집중된 부는 재투자되어 새로운 부를 창출한 것이 아니라 무가치한 소비를 위해 사용되었다. 신사층과 관료들은 이처럼 농업이 몰락하고 상업이 발전함을 한탄하며 농민들이 토지에 붙어있지 않고 떠돌아다님을 개탄했지만, 한편으로 이 거대한 경제 속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자들이었다. 시장경제는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나 혹은 이에 준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경제를 조절하고 재산권을 보장하며 화폐와 신용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이 없다면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가능하지 않던 것이다.

명조정이 이러한 문제와 모순점들을 완전히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쪽에선 농민들이 굶어죽거나 비참한 기아선상을 해매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한 쪽에선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해 초호화판 생활을 벌이는 신사층과 상인들이 있었다. 조정은 계속해서 세제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가능하다면 이 거대한 상업경제를 조정의 통치와 결합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현재 있는 세금이라도 최대한 공정하게 거두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2세기에 걸쳐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그리고 만력제의 시대에 들어 세재 개혁들이 일조편법이라는 제도로 종합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