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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운영론 (5)

사회과학/인터넷
황제(黃帝) 때, 대외(大隗)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났다. 황제는 그가 재주있다는 말을 듣고, 방명(方明), 창우(昌寓), 장약(張若)등 여섯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나섰다. 구자산(具茨山)의 한 산골짜기에서 일곱 사람은 길을 잃었다. 마침 곁에 목동이 한명 보여서 그에게 구자산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목동은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그에게 대외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니, 목동은 역시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구자산과 대외에 관해서 일곱 명에게 상세히 얘기해 주었다. 황제는 이 목동이 나이는 어리지만 말에 조리가 있어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를 아는가?" 그러자 목동이 대답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내가 말을 키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해로운 말을 없애면 됩니다."

『太平寰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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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에서든 거의 모두 곤란한 인물이 하나 이상은 끼어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존재목적은 마치 일을 그르치기 위해서 있는 듯하다. 운영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기실 최고운영자가 그 지닌바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여 올바르지 못한 자를 끌어내고 그렇지 않은 자를 중용한다 해도 이러한 자들이 하나 이상 들어오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들은 굳이 말하자면 업무의 파괴자이며 조직의 적이다. 이러한 파괴자의 능력이 비범한 이유는 파괴가 그 반대보다 쉽다는데 있다. 장인이 긴 시간을 들여 만든 명품 도자기도 당나귀 한마리가 한번에 부술 수 있다. 만일 조직안에 이런 못된 당나귀가 하나라도 있으면, 아무리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좋은 성과를 보일 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구정물에 술을 한 컵 부으면 여전히 구정물이다. 그러나 술에 구정물을 한 컵 부으면 술은 구정물이 된다. 당나귀와 장인의 관계도 이와 같다. 최고운영자가 당나귀에게 제약을 가하느냐의 여부는 조직의 업적과 효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만일 커뮤니티에 당나귀가 있다면, 운영진은 마땅히 그 당나귀를 제거해야 한다. 만일 여러가지 이유로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묶어두어야 한다.

당나귀들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업무의 파괴에 그치지 않는다. 도자기가 부숴져도 다시 구워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당나귀가 계속하여 도자기들을 파괴하고 일을 방해한다면 장인들이 계속하여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하리라 기대해선 안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조직 자체의 와해로 향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 이를 거스르려 할 때 최고운영자는 조직 전체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 해악이 지대함에도 만약 당나귀를 제거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현재까지 주로 권한에 대해 논의해왔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항상 권한으로만 돌아가는것은 아니다. 지닌 권한의 적절한 행사법, 그것이 정당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도덕성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상호작용, 마지막으로 운영자 본인의 신념이나 최소한의 책임감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가급적 권한에 대해서만 논한 이유는 이러한 품성은 뛰어난 안목과 깊은 경험을 전제치 않고서는 성립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하는게 보다 옳은지에 대해 쉽게 판단내리지 못하며 그에 대해 깊게 생각치 못하고 처리하기 마련이다. 이제 권한 외의 부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어떠한 조직이 마련되어 충분히 돌아가려면 그 권한이 정해져야 함은 마땅하다. 많은 사람을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게 하는 방법의 하나는 명분이고 다른 하나는 권한이다. 훌륭한 명분은 다수의 사람에게 정신적 지주로서 작용하여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함과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의 열정을 최대의 효율로 뽑아내는데에 함께 필요한게 조직화된 권한이다.

그러나 운영자가 아무리 법규에 따라 훌륭한 운영을 하고, 권한을 통하여 일을 하여도 이를 통해 모든 해악을 걸러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간혹 법을 어기진 않으나 없는것이 더 나은 자가 있다. 그들은 법으로는 잡을 수 없는 해악이다. 법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골치가 아프다.

법규로서 이러한 해악을 잡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다수가 믿는 도덕이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 논한 바와 같이 다수가 믿는 올바름義이 실천되었을 때 항상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흐른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는 가장 훌륭한 학자들조차 대답하기 어려우며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 두번째 이유는 법규는 보편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혹한 커뮤니티가 선량한 회원에게도 가혹하기 쉽듯이 관대한 커뮤니티는 해악에게도 관대하기 쉽다. 만약 해악을 잡기 위해 회칙과 법제를 보완하면 그것은 마치 농약과도 같아서 해충을 잡는 만큼 작물에도 손상을 입힐 것이다. 이 일이 처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렇다고 하여서 해악을 방치한다면 해충이 곧 작물을 갉아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번째 이유는 조직이 반드시 권한만으로 돌아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조직이 상호관계와 신뢰에 기반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이는 양날의 칼이 되어 당나귀의 활동에 도움을 주게 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할 수록 상호간의 벽이 낮아지며 활발한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이것은 업무의 효율성에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다(만약 이러한 조직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자산인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열린 소통의 경로로 해악이 들어오면 순식간에 전체가 마비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조직에서 특정자를 쫒아낸다는 것은 다른 모두에게도 영향을 주기 쉬우며 조직의 가장 뛰어난 자산에도 손상을 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충을 줄일 것인가? 해충이 지나치게 들끓어 작물을 얻을 수 없는 지경이라면 모를까 단순히 저러한 해악이 소수 있다고 하여 약을 치지는 않는다. 법제는 보편적이기에 반드시 작물에도 손상이 가는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작물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해충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그들을 집게로 잡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약으로 처리할 수 없는 해충에 대한 최선의 방법이다.

이제 그 집게는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운영자 자신이 지닌 권위이자 신뢰이다. 권위는 거부를 거부하며 신뢰는 믿음으로 믿게한다. 최고운영자가 스스로의 그 공정함과 정당함을 행사했으며 직분에 걸맞은 행동을 취해왔다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법제의 측면에서 애매하다고 해도 회원들은 전례에 따라 운영자를 따를 것이다.

선으로 남을 이끄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고 남과 화합하는 것을 유순하다한다. 이에 반해 불선으로 남을 이끄는 것을 타락시킨다 하고 남과 화합하는 것은 아첨이라고 한다. 이 짧은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일컬어 유순하다고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일컬어 아첨한다고 할 수 있는지 판단내리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안다 해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흠.. 이거 제목이 뭐가 좋을까.)

사회과학
최근 정국은 상당한 혼란에 빠져있다. 특히 근 일년에 걸쳐 시내에서 시위대를 보는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시위를 함은 불만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은 경찰이다. 말 그대로 사회가 10년 전으로 돌아가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을 강력히 비난하는 것은 틀리지는 않았으나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명박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가 원인으로 생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해도 이처럼 온갖 공권력을 단번에 과거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현재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조직에 대해 생각해보자. 참여정부 시절, 농민시위에서 전용철, 홍득표 두 사람이 죽는 일이 있었다. 인권위에서는 경찰의 과잉진압이 원인이라고 했고, 이러한 조사가 발표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내며 사과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이 사과에 대해서는, 시위대가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힘들게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의 사기와 안전을 걱정하는 분들의 불만과 우려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권력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스스로 이러한 분위기로 몰아갔음에도 경찰에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남용될 경우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에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더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이러한 노력은 분명 옳은 방향이었을 것이다. 경찰도 인권위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노무현까지의 이야기이다. 이명박 대통령 이후로 경찰은 그야말로 폭주하고 있고 아我와 적敵을 갈라버렸다. 이는 공권력으로서 도저히 용납해서는 안될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도 그러하다. 당연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압박은 이명박에게 당연히 아무런 도움이 안됬고, 그가 바란 바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표적수사를 받고 결국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명박 대통령은 강력한 역풍을 받았다. 이미 부족한 도덕성이 그 숨통조차 끊겼다. 그렇다면 누가 원해서 노무현을 수사한 것인가?

지난 참여정부 5년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지나친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다시피 검사가 작정하면 사람 하나 잡는건 일도 아니다. 노 대통령은 민주화된 법제에서라면 이처럼 검찰에 권한이 집중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시행했다. 검찰은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항하였으나 어쨌건 대놓고 정권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물러나고 정권이 교체되고 나자 검찰은 보복했다. 그것도 스스로도 놀랄만큼 강력하게.

일련의 사태들이 보여주는 바는 명백하다. 이명박 정부가 검경을 포함한 각 조직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검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느냐는 일단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물론 어찌되었건 이명박은 대통령이고 그의 권한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검찰의 행동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지는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결국 임기제이고 오래갈 수 없다. 이명박은 자신이 물러난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가 검경에 대한 제한에 나선다면 그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현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있다. 레임덕은 흔히 임기말에 생기는 권력의 누수라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취임 1년만에 이명박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이례적일수는 있으나 놀랄 일은 아니다.

반드시 행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가 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두 기관이 그야말로 모든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혼란에 빠져있다. 검찰이 이례적으로 폭주하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경찰조직도 불명확한 상부의 의지에 따르고 있는 쪽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정치권력이 무너졌는가?

이러한 문제를 다시 조망하기 위해 조금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보자. 과거에는 대통령의 권력이 매우 강력했다. 이를테면 전두환 당시 재계 7위에 올라있던 국제그룹 해체를 상기해보자. 대통령이 작정하면 재벌 하나쯤 날아가는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법계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고 국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흘렀다. 오늘날 대통령들은 독재시기만큼 강력하지 않다. 군인 출신들은 정치에서 물러났고 대통령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막걸리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아마 현재의 대통령이 어떤 재벌그룹(이를테면 S모라던가..)을 해체한다는건 상당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정치권력이 약화되는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크게 나쁜 일은 아니다. 시민들은 마땅히 자유로와야 하며 국가가 시민들의 그러한 자유로움을 부당히 제약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약화된 정치권력의 공백이 제대로 매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빈 자리에 곳에 들어온 것은 시민들도 아니었고 민중도 아니었다. 재벌권력이 정치권력을 조롱하고 사법권력과 영합하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보면 독재 대통령보다도 훨씬 질이 나쁘다. 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정치권력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그 본래 가져야 할 통제력을 다시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치권력이 약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옛 군부독재시대라면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군부시대 대통령은 그렇게 권력을 잡았고 또한 그것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그렇지는 않다. 민주사회에서는 마땅히 인민의 지지를 얻는 자가 권력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현 정치세력 중에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가? 집권당인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대통령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보자.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것도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하는것도 아니다. 나라를 망치고 싶어하는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그저 바라는 것도 없고 목적하는 것도 없을 뿐이다.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고 긴 안목도 없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고 있다. 하나의 정책조차 만들 능력이 없다. 말 그대로 단순한 잉여다.

지난 대선을 다시 떠올려보자. 지금 보아도 이명박 당시 후보가 내놓았던 공약은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한편으론 진부하기까지 했었다. 이 얼마나 건설(!)적이고 시대착오적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선된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른 후보들은 이명박 만큼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동영 후보를 포함해서 다른 야당 후보들은 사실상 아무런 그림도 제시하지 않았다. 자신이 뭘 하겠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말할 만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갑자기 삼수를 선언한 이회창 후보도 그러했고 민노당조차도 스스로의 공약으로 무능함과 멍청함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선 오히려 이명박 대통령을 능가하기까지 했다. 인민들은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대안도 없었다.

과거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하나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조국의 근대화였다. 부당한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고, 구미, 일본만큼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이 기치를 위해 실제로 얼마만큼 행동하였고 얼마만큼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이 표현하는 바는 아직도 그가 현대 한국에 드리운 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정희는 국민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제시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민주사회로 이행한 후 나타난 정치인들이 옛 독재시대 만큼도 국민들에 미래를 제시치 못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의미에선 기묘하기까지 하다.

오늘날까지도 박정희라는 존재와 그가 내건 슬로건이 유효한 이유는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아무런 것도 등장하지 않음이 한 원인이다. 이명박 후보는 이처럼 모든 정치인이 목적을 잃고 해매는 그 중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비젼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이 어떻게 해야 옳은 선거가 되었을까. 선거를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제도는 제도만으로 유지되는게 아니다.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그리고 제도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과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절차적 정당성이 국민의 뜻에 반하는 무능한 대통령을 방어하는 개념이 되어버린 이유는 이에 있다.

Planet Hell

취미/음악


Denying the lying
거짓을 부인하며

A million children fighting
수많은 아이들이 싸운다

For lives in strife
투쟁속의 삶을 위해

For hope beyond the horizon
지평선 너머 희망을 향해


A dead world
사멸한 세계

A dark path
암흑의 길

Not even crossroads to choose from
내가 지나온 핏빛 융단 너머엔

All the bloodred carpets before me
선택할 갈림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Behold this fair creation of God
신의 이 공명정대한 창조물을 주시하라

My only wish to leave behind
나의 유일한 소망은 버리고 떠나가는 것

All the days of the Earth
지상의 모든 나날에

An everyday hell of my kingdom come
왕국에 도래하는 지옥의 매일이여


The 1st rock thrown again
첫 번째 바위는 다시 던져졌다

Welcome to hell, little Saint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어린 성자여!

Mother Gaia in slaughter
어머니 가이아는 도살되었나니

Welcome to paradise, Soldier
낙원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전사여!


My 1st cry neverending
나의 첫 번째 오열은 영원하고

All life is to fear for life
모든 생은 삶에 대한 두려움

You fool, you wanderer
그대, 어리석은 방랑자여

You challenged the gods and lost
너희는 신에게 도전했으며 그리고 패배했다.



Save yourself a penny for the ferryman
카론의 뱃삯으로 너희 스스로를 구하라

Save yourself and let them suffer
너희를 구하고 그들에게는 고통을 남겨라

In hope
희망 속에

In love
사랑 속에

This world ain't ready for The Ark
이 세계는 방주에 탈 준비가 되지 않았나니

Save yourself a penny for the ferryman
카론의 뱃삯으로 너희 스스로를 구하라

Save yourself and let them suffer
너희를 구하고 그들에게는 고통을 남겨라

In hope
희망 속에

In love
사랑 속에

Mankind works in mysterious ways
인류의 행동은 수수께끼


Welcome Down
환영한다

To my
나의

Planet Hell
Planet Hell에 온 것을!


Save yourself a penny for the ferryman
카론의 뱃삯으로 너희 스스로를 구하라

Save yourself and let them suffer
너희를 구하고 그들에게는 고통을 남겨라

In hope
희망 속에

In love
사랑 속에

This world ain't ready for The Ark
이 세계는 방주에 탈 준비가 되지 않았나니

Save yourself a penny for the ferryman
카론의 뱃삯으로 너희 스스로를 구하라

Save yourself and let them suffer
너희를 구하고 그들에게는 고통을 남겨라

In hope
희망 속에

In love
사랑 속에

Mankind works in mysterious ways
인류의 행동은 수수께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