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o

최첨단 법제

사회과학
여기 어떤 망치가 있다고 하자. 이 망치는 머리와 자루가 모두 옥玉으로 되어있으며 뛰어난 장인이 긴 시간을 두어 조각했다. 그 결과 빛을 비추면 몸에서 광채가 나며 그 예술성으로 인해 보는 사람마다 찬탄을 아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망치로 못을 박으려 하면 오히려 망치가 손상되었으며 강하게 힘을 주면 망치가 부숴졌다. 때문에 이 망치로는 못을 박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망치는 과연 망치로서 제대로 됬다고 할 수 있을까?

李노동 "국내 비정규직 보호제도는 최첨단"(종합)

필자는 위 기사를 읽으면서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글은 현실을 무시하고 엉뚱한 것을 기준 삼아서 정책을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법이건 간에, 그 용도는 반드시 사회와 세속에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어느 지역 어느 시대의 법조문이라도 그 자체를 읽는것만으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혹은 시대를 뛰어넘는 최첨단인지 오히려 반동적인지는 알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법은 현실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현실을 모르고서는 법조문 자체를 읽는것만으로 그것이 악법인지를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시했던 망치는 예술품으로서는 훌륭할 지 모르나 공구로서는 그렇지 못했다. 법조문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만들어지고 이상적으로 계획되었건 간에, 현실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창조적인 예술가가 망치의 형상을 따서 예술품을 만들어도 그것은 그 예술가 개인에 속한다. 때문에 그것이 맘에 안든다면 새 망치를 하나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 국가에 법은 오로지 하나이다. 법은 오로지 법으로서 작용해야하지 사상적 유희로 사용할 수 없다. 법은 만드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법의 본래 목적(本)이다.

프로그래머들의 고전인 "프로그래밍 심리학"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있다.

                 *                  *                  *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향하던 프로그래머는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다시 의뢰 회사로 돌아왔다. 프로젝트 팀들과 진행자들 앞에서 그는 그 새로운 프로그래밍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기존 프로젝트 팀의 반응은 냉랭했다. 한 프로그래머가 물었다.

"당신의 프로그램은 얼마나 빠르게 일을 처리합니까?"
"10초에 한 장 정도일 것입니다."

물어본 프로그래머가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은 초당 한 장을 처리할 수 있다며 새 프로그램을 비웃자, 새 프로그램을 들고온 프로그래머가 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만든 프로그램은 작동하지 않잖아요. 작동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면 나는 초당 10장을 처리하는 프로그램도 만들 수 있어요."

자유와 질서

사회과학/철학
자유라는 말은 흔히 통제와 반대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요컨데 자유는 오로지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으며 통제로부터 벗어나야만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길거리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하려면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이를테면 행인을 습격하는 강도라던)가 제거되어야만 한다. 자유는 방치함에서 탄생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자유라는 말은 '누군가(혹은 무엇인가)'가 구속받지 않음을 의미하며, 여기서 그 누군가는 곧 주체(주관:主觀)이다. 정치사상이나 사회학에서 그 주체는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보면 자유는 인간의 본성(마음)대로 행동함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요컨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마음이 규정한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 곧 자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결코 무질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단어의 기의가 곧 엔트로피의 특정 방향으로의 역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작동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 유기체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이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설계도에 쓰여진 대로(질서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자유와 통제는 상충하는게 아니라 완벽한 동일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통제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통제나 절제가 방향이 잘못되어 필요하지 않은 곳에 적용되었거나 혹은 본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으나 결과가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맨 처음의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인을 습격하는 강도의 통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법자가 처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통제당한다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도 해를 당할 수 있고 자기가 남을 해입힐 수도 있는 사회보다는 자기도 당하지 않고 자기가 남을 당하게 할 수도 없는 사회를 더 선호한다(당연하게도 내전중인 국가나 무정부상태인 국가는 여행이나 이민에서 기피 대상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행자의 통행을 막거나 집에서 나서지 못하게 한다면 이 경우엔 대부분의 사람이 반발하며, 자신들의 당연한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느끼며 답답해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를테면 먹고 살 길)이 막힌다면 그저 답답해 하는 수준을 넘어서 국가와 사회를 적대하기까지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다. 결국 자유는 인간이 하려고 하는 것을 하게 해주는 것이며 그러지 않으려는 것을 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이 그저 '사회엔 질서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필요하지도 않고 비용만 들며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는 통제를 강요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회엔 질서와 통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질서와 어떠한 종류의 통제도 허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통이란 무엇인가

사회과학/심리학
한때 MSN메신져에 '심심이'라는 봇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있었다. 이 봇은 흔히 말하는 채팅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말 그대로 심심할 때, 말을 걸면 대답을 해주는 그런 봇이었다. 메신져에 친구가 없다면 꽤 할 만한 일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 심심이와의 대화를 길게 지속하지 못했다. 심심이는 그저 유저가 거는 말을 어떤 장치에 따라 단어를 재배열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으며, 유저들은 심심이와 두세마디만 나누어도 그 어색함을 바로 느낄 정도였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유저들이 직접 심심이에게 특정 말에 대한 응답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나쁘게 되었다. 심심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사람이 많다보니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 마다 유저들이 입력한 서로 다른 말투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처럼 말할 때마다 말투가 바뀌는 이 괴이한(…) 화자는 그다지 감동스러운 결과물은 아니었다.

심심이가 나오기 수십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가 언젠가 사람과 대화할 날이 올거라 기대했으며 실제로 수많은 프로그램이 제작되어 사람과 대화(주로 채팅 위주였지만)할 수 있도록 되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들의 대부분은 잊혀지거나 폐기되었으며 가끔씩 옛 자료실의 무덤에서나 발견되는 유물로 전락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이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었다. 소통과 대화는 단순히 단어와 글자, 소리의 모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 A.I.에 나오는 인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로봇들, 역시 영화 매트릭스Matrix에 등장하는 인간을 점령하여 마음을 조종하는 기계들, 일본의 만화책 쵸비츠ちょびっツ, Chobits에 나오는 아름다운 로봇 컴퓨터와 인간 사이의 사랑은 말 그대로 영화와 만화속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아주 간단한 (정말로 간단한) 대화조차 하지 못한다.

"우리 이제 그만 사귀자."
"어떤 자식이야?"

Steven Pinker,《Language instinct》

이 짧은 대화는 참 간단해보인다. 그러나 저 대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프로세스가 있었을 것인가?

그렇다면 대체 소통이란 무엇인가. 스피커와 마이크를 각각 한 쌍 준비하고 서로 소리를 나오게 하며 이를 마이크로 녹음할 수 있다고 해서 소통이라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저 소리의 집합을 더한 것이지 이를 해석하지도, 정보를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해석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주옥같은 말이라도 그저 노이즈(noise: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해석과 이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글 등을 읽다가 한 글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그 글자가 단순히 선의 집합체로 보이며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생긴다. 흔히 게슈탈트 붕괴라고 알려진 이 현상은 통일성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게슈탈트 붕괴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전제(통일성)를 잃게 되어서 생기는 것이다.

어떤 글자를 볼 때 그 글자들의 의미가 이해되려면 이들 선의 집합을 특정한 절차에 걸쳐 처리할 수 있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그 프로세스를 우리는 기본적으로 켜놓고 있으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책을 보면 바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프로세스(당연한 전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 프로세스가 작동을 멈추게 되고 이것이 바로 게슈탈트 붕괴이며 통일성의 상실이다.

수신자의 첫 단계가 바로 이것이다.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그대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그 의미를 프로세스에 따라 해석해내는 것을 말한다. 손상되지 않은 소리파일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가 말을 더 잘 기억하고 이해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인간은 대화중 화자의 음성을 75%정도밖에 듣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의 해석만으로 대화가 끝나진 않는다. 그로서 얻은 정보를 평가 분석하여 자기 자신을 확장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거절이라도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여 이를 자신이 가진 상식에 비추어 생각한 뒤에 옳지 않다 생각하여 거절하는 것은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의 말을 듣고 이해는 했으나 혼자의 아집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는것은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요컨데 누군가에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게 아니라 '당신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남의 마음을 느끼는 능력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데에 반드시 요구된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는건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를 잃고 있다는 말일 수 밖에 없다.

소통이란건 수신修身을 기본으로 한다. 대화로 타인을 깨우치기 어려운 이유는 소통이 일방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무력과는 달리 박수와 같이 양 손 사이 최소한의 맞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한 쪽이 높은 관용과 이해도를 지녀서 다른 쪽을 이끌어줄 수 있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상대가 최소한의 스스로를 평가하는 능력을 지녀야만 가능하다. 상대의 마음을 느끼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어쩔 방법이 없다.

커뮤니티 운영론 (최종)

사회과학/인터넷
- 蜜柑 -

Steven Pinker,《Language instinct》

---------------------------------------------------------------------------------------------------------------

과거 유럽인들이 외부 세계를 향하며 최초로 상상한 그림을 보면, 매우 기이한(이를테면 눈이 하나밖에 없거나 머리가 없고 가슴에 얼굴의 형상이 달려있거나 하는) 생명체들이 존재했다. 아직 유럽이 세계를 알지 못했을때 그 미지를 향한 상상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던 가상의 생명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그들이 도달한 미지의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재잘거리며 다가왔다. 이 신세계의 주민들은 외눈박이도 아니었고 한 다리로 걷지도 않았으며 인디펜던스 데이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알 수 없는 전파를 보내고 있지도 않았다. 이들 사이에 최초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언어로 말하며 소통하고 사회에 사는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많은 사람은 서로 이야기하며 감정을 나누고 친구와 떠들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 반면 혼자 있고 따로 떨어져있다고 느낄때 고독해하고 두려워한다. 이처럼 인간은 함께 돕는 존재인 것이다. 세계 어느곳의 인간이라도 그러길 바라는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보자. 커뮤니티community란 무엇인가? 커뮤니티는 곧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다. 소통이며 대화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같이 있고자 하는 마음의 발현이다. 서로 같은 관심사를 지닌 사람끼리 모여서 만들어지는 공동체이며 탄생부터 내재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과 정보의 전달이다.

본 글은 커뮤니티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우기 위해 쓰여졌다. 처음 커뮤니티를 개설하는 사람은, 잘못 회원을 괴롭히려고 한 게 아니라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알리길 바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렇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누구라도 악해지고 싶어하지 않으며 잘못된 길을 걷고 싶어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소통치 않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미움에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로운 대화와 소통이 그저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구조적 장치와 제도적 기반, 그리고 회원 개개인의 존중의 노력을 요구한다. 커뮤니티론은 오로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며, 만약 본 글이 이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즉시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나도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대도 말할 수 있게 하라." 이것이 커뮤니티의 대원칙이다. 나 때문에 그대가 말할 수 없어서는 안되며 그대 때문에 내가 말할 수 없어서도 안된다. 커뮤니티의 죽음이란 대화가 없어지는 것이다. 소통이 끊기는 것이다. 모두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이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커뮤니티의 목적이다.

커뮤니티 운영론 (8)

사회과학/인터넷
 제 환공이 사냥을 떠났다가 길을 잃었다. 도중에 한 노인을 만나서 이곳이 어디냐 묻자 노인이 대답하기를,
 "제 이름을 따서 바보의 골짜기라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환공이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전혀 그리 보이지 아니한데 어찌 바보라 불리십니까?"
 "이전에 소를 키워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시장에 가서 송아지를 팔고 망아지로 바꾸어 오니 이웃 청년이 '소가 망아지를 낳을 리가 없으니 이것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빼앗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자 환공이 웃으며 "그게 사실이라면 노인은 정말로 바보요. 어찌 그러고도 관아에 신고치 않은게요?" 라고 하자 노인이 별 말 없이 나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다음날 환공이 이 이야기를 하자 관중이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그 노인은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니라니 무슨 말이오?"
 "백주대낮에 남의 망아지를 빼앗아가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것은 관청이 백성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불온한 일을 신고치 아니함은 이미 백성으로부터 권위를 잃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소중한 망아지를 빼앗기고도 입을 다무는 일이 생기겠습니까? 한시바삐 관리들을 다시 다스려야겠습니다."

『說苑』
-------------------------------------------------------------------------------------------------------------------

흔히 권위라는 말은 고압적, 강제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나쁜 의미로 쓰이기 좋다. 이를테면 권위적인, 권위주의인, 등이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은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보다 더 신뢰하며 가급적 보다 권위있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처리해주길 바란다. 왜 그러한가?

사전에 따르면 권위는 제도, 이념, 인격, 지위 등이 그 가치의 우위성을 공인시키는 능력 또는 위력이라 되어있다. 이것은 권위라는 것이 단순히 위와 아래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여 될 만한 자에게 부여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변호사를 믿는 것은 그가 단순히 변호사라는 명칭을 가졌임에 근거한게 아니라, 변호사라는 명칭과 자격증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법에 대해 더 잘 안다는 사실을 보장하기에 그러하다.

이러한 권위는 일의 능률적인 처리에 기여한다. 모든 일엔 전문가가 있으며 문외한이 있기 마련이다. 훌륭한 운전수가 그 자신의 뛰어난 운전실력 만큼의 법학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운전은 운전수에게 맡기면 되며 법률은 변호사에게 맡기면 된다. 이처럼 권위가 부여받을 만한 자에게 부여된다면 사회는 매우 효율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효능에도 불구하고 종종 권위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며 그 신뢰를 잃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권위와 실제 사이에 어떠한 불일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권위를 지닌 자가 권위에 마땅한 일을 하지 못하거나, 혹은 마땅하지 않은 자에게 권위가 부여된다면 무엇으로 그 부여된 권위를 믿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권위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뢰를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음식점을 갔는데 음식이 맛이 없었다면 이후로 그 음식점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자주 즐기던 단골 음식점에서 하루 잘못하여 맛없는 음식이 나온다고 해서 이후로 찾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미 신뢰가 쌓여있기 때문에, 하루 정도 맛없는 음식이 나오는 것은 실수의 범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데 신뢰라는것은 한 번 잘했다고 쉬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못했다고 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의 경중과 처리를 항상 적절하게 해야하며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만큼 주며 넘침에서 덜어서 부족함에 주며 실수는 해명하고 고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회원을 위한답시고 지나치게 모든 사항을 밝히려 할 것은 없다. 회원들이 특별히 궁금해하며 납득시켜야만 것이 아니라면 필요한 사항만 짚어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주어야 한다. 전문가는 비전문가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는 다만 고객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떠맡길 것이라면 애초에 전문가가 무슨 소용인가?).

때문에 제대로 된 전문가라면 고객들에게 이해와 신뢰를 요구할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끌어내야한다. 그 분야에서 권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할 일은 자신이 해당 분야에 있어서 누구보다 잘 알거나 업무를 잘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결과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과정을 일일이 세세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항을 짚어서 정리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능하면 변명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하나, 기실 변명할 일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다. 때문에 변명할 일이 생긴다면 훌륭한 변명을 해야한다. 변명이란 책임의 회피를 위한 도구가 아니며 듣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해주며 잘못의 원인을 밝히고 후일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변명은 회원이나 고객을 위한 변명이 아니다. 상대가 이해해준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요행일 뿐, 어찌되었건 한번 실패한 것은 그것으로 끝이며 상대가 아예 변명을 듣지 않는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기실 실수는 어찌 되었건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스스로 이후에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변명이 필요한 것이다. 상대가 요구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변명을 하여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고 할 수 있는 최고의 변명을 하여 반복치 않는 것이 진정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겠는가? )

커뮤니티 운영론 (7)

사회과학/인터넷
 덕으로 교화하는 일은 위로부터 아래로 행해지며,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부터 나중에 태어난 사람에게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인자하지 않으면 자식이 효성스럽지 않고, 형이 우애롭지 않으면 동생이 공손하지 않으며, 남편이 떳떳하지 않으면 아내가 순종치 않는다.
 아버지가 인자한데도 자식이 거스르고, 형이 우애로운데도 동생이 오만하며, 남편이 떳떳한데도 아내가 업신여긴다면, 이들은 천성이 흉악한 인간들로, 형벌을 가하여 두려워하게 해야지 가르치고 선도해서 태도를 바꾸어놓을 대상이 아니다.

『顔氏家訓』

-----------------------------------------------------------

 오늘날 인간의 질병에 의한 사망률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게 암(癌 : cancer)이다. 본래 육체는 세포의 분열(탄생)과 성장, 그리고 (수명이 다하여) 사멸함을 반복함으로서 유지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체계가 어떠한 이유로 손상되어 사멸되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고 과다 증식하게 되어 주위 조직을 파괴하면 육체가 이를 견디지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암이라고 한다.

 가장 건강한 사람들조차 몸 속에 암을 지니고 살며 이들 암세포는 언제라도 다른 신체조직에 전이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암은 누구에게나 발병할 가능성을 갖추고 있으며, 기실 대부분의 인간은 암에 걸리지 않는다기보다는 암이 발생하기 전에 늙어 죽는 것이라 하는게 보다 사실에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이것이 세포 자체에 내재된 속성인 이상 이를 극복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큰 문제를 겪지 않는데, 왜냐하면 신체에는 암세포가 발생하자마자 자체적인 신체 메커니즘을 통하여 상궤를 벗어난 세포를 파괴하도록 하는 자체 방어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진화는 암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온전한 수명을 누리고 나서 죽을 수 있도록 안배하는데에 성공하였다.

* * *

 본래 커뮤니티에서 운영진이 제대로 그 직무를 수행하고 중심을 잡아 올바르게 처신하고 있다면 대부분의 회원은 굳이 불만을 지니지 않으며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모든 회원이 그런것은 아니다. 운영진이 아무리 훌륭하게 운영을 하고, 회원들이 얼마나 선량하건 간에 분란을 일으키는 회원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들이 바로 암이다. 커뮤니티를 개방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면 이러한 불의한 자들이 반드시 따라올 수 밖에 없다.

 많은 커뮤니티 운영자들은 저러한 회원들을 적절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예 새로운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도록 하여 커뮤니티의 입구를 좁히고 그 뒤 검문소를 설치하여 철저하게 암을 발본색원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강한 항암제는 신체도 손상시킨다. 암이 크게 진행되어 커뮤니티 전체를 감염시키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러한 제재는 정상적인 세포들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꼴이다. 만약 운영진이 이러한 태도를 계속하여 고수한다면 그들은 어느날 문득, 커뮤니티의 수명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저러한 흉악한 회원들이 들어오는것은, 커뮤니티가 그 본연의 목적에 맞게 적절하게 운영되고 있다면 당연히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운영진이 커뮤니티를 훌륭하게 운영하고 싶다면 결코 저러한 회원들을 회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운영진은 잘못된 회원을 구별해내어야 하며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되는지를 생각해야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면 암은 그 최초의 진원지로부터 온 몸으로 퍼져 끝내는 모두에게 최악의 사태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운영진은 이러한 잘못된 회원들을 교화하려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영진 스스로가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고, 다른 회원들도 크게 무리치 않고 있음에도 흉악한 언행을 일삼는다면 그들을 인도하는것은 가정과 학교에서 할 일이지 기업이나 동호회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영진이 이러한 잘못된 자들을 걱정하여 배려하면 수많은 선량한 회원들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불의를 띄우고 올바름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챙기는 것이다.

 암이 암인 이유는 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주변 세포들에게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존하며 타인과 관계치 않는다면, 혹은 관계터라도 피해를 주지 않고 반발치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으며 누가 이를 따지겠는가? 그러나 거듭 이야기하거니와 피해를 줌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고려치 않을 것을 생각하고 필요한 것을 제약하여 당장 피해가 오지 않는다, 때가 아니라 말하면 도대체 누가 회원들을 지키고 누가 커뮤니티를 보호할 것인가?

 독기를 쐬면 독을 품는 법이다. 불의를 보면서도 참을 자는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못된 말과 지나친 행동이 쏟아짐에도 평온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적으며, 모욕 당하고 인격을 손상당하면서도 분을 억제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이러한 수모를 자주 겪으면 각박하고 깐깐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독이 흐르며 전염된다. 결국 이전에 극히 적게 존재하던 암세포는 무한으로 증식하게 되어 온 몸을 점할 것이니 그 지경에 와서 누구를 탓할 것인가?

* * *

커뮤니티 운영론 (6)

사회과학/인터넷
하루는 제 경공齊 景公이 대에 올라가 재상 안영晏嬰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사람을 보고 말했다. "저 자는 (내가 말하는 것에 좋아하고 내 의견에 동의해주니) 나와 화합和한다." 이에 안영이 "그는 군주와 화하는게 아니라 동同합니다."라고 말하자 제경공이 '화함과 동함의 차이에 대하여 묻고싶다.' 하였다.

안영이 말하기를 "화함은 음식으로 말하자면 짠 맛, 단 맛, 매운 맛, 쓴 맛, 등이 함께하여 하나의 먹거리로 되는 것이며 음악으로 따지면 서로 다른 수많은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노래가 되는 것이니 그 조화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하는 것은 음식으로 따지면 오로지 짠 맛만 나는 것이며 음악으로 치면 오로지 하나의 음만 나는 것이니 즐길 것이 못됩니다. 지금 저 자는 자신의 의견이 없이 군주가 말하면 옳다 하고 아첨하며 스스로의 말을 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스스로와 군주를 함꼐 망치는 것으로서 경계해야 마땅합니다."하고 함에 경공이 "좋다."고 하였다.

----------------------------------------------------------------------------------------

많은 커뮤니티에서는 흔히 회원들에게 예를 강제하려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큰 오류는 애초에 그들이 예라고 생각하여 요구한게 예가 아님에 있다. 커뮤니티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출생과 배경이 다르며 입장과 언행도 언행이 같을 수 없다. 이처럼 언행이 다른 사람들이 있을때 그들에게 동일한 언행을 강제하여 통일시킬 필요가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회원의 언행을 평할지에 대해 논의치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 기준은 마땅히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보편과 특수 사이에서 올바른 위치를 잡을 수 있어야 하며 그와 동시에 해악을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선은 마땅히 조화和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의견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동일한 어체와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것도 가능치 않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다양성이 사라지고 단일한 시계視界에 의해 그 바라봄이 왜곡되면 그 폐해가 어디에 이를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양성을 추구한다하여 모든 종류의 맛을 아무렇게나 넣으면 그 음식은 도저히 먹을 것이 못 될 것이다. 연주에 있어서 잘못된 소리가 나타나면 전체의 맥이 깨져버리듯이 회원의 언행에도 다르나 조화로운게 있고 같으나 잘못된 것이 있다. 그렇기에 균형이 있고 조화가 있고 맥이 있다.

소금을 넣지 않는 이유는 소금의 짠 맛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소금을 더 넣으면 음식을 망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을 판정할 때엔 그 일 자체만을 잘라내서 판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주변과 중심을 함께 봐야만한다. 만약 그러한 치도를 모르고 관대함을 문약함과 착각하며 엄중함을 가혹함과 구별치 못하면 조미료와 음식을 다 같이 망칠 것이다.

조화를 알면 서로 다름이 공존케 할 수 있다. 조화를 모르면 다름을 거부할 것이니 그러면 일률적으로 동하거나 반대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 서로 다른 이가 함께 있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본분을 따르고 해악을 걸러내어 선을 그어야 한다.

커뮤니티 운영론 (5)

사회과학/인터넷
황제(黃帝) 때, 대외(大隗)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났다. 황제는 그가 재주있다는 말을 듣고, 방명(方明), 창우(昌寓), 장약(張若)등 여섯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나섰다. 구자산(具茨山)의 한 산골짜기에서 일곱 사람은 길을 잃었다. 마침 곁에 목동이 한명 보여서 그에게 구자산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목동은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그에게 대외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니, 목동은 역시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구자산과 대외에 관해서 일곱 명에게 상세히 얘기해 주었다. 황제는 이 목동이 나이는 어리지만 말에 조리가 있어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를 아는가?" 그러자 목동이 대답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내가 말을 키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해로운 말을 없애면 됩니다."

『太平寰宇記』
-------------------------------------------------------------------------------------------------------------------

어떤 조직에서든 거의 모두 곤란한 인물이 하나 이상은 끼어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존재목적은 마치 일을 그르치기 위해서 있는 듯하다. 운영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기실 최고운영자가 그 지닌바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여 올바르지 못한 자를 끌어내고 그렇지 않은 자를 중용한다 해도 이러한 자들이 하나 이상 들어오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들은 굳이 말하자면 업무의 파괴자이며 조직의 적이다. 이러한 파괴자의 능력이 비범한 이유는 파괴가 그 반대보다 쉽다는데 있다. 장인이 긴 시간을 들여 만든 명품 도자기도 당나귀 한마리가 한번에 부술 수 있다. 만일 조직안에 이런 못된 당나귀가 하나라도 있으면, 아무리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좋은 성과를 보일 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구정물에 술을 한 컵 부으면 여전히 구정물이다. 그러나 술에 구정물을 한 컵 부으면 술은 구정물이 된다. 당나귀와 장인의 관계도 이와 같다. 최고운영자가 당나귀에게 제약을 가하느냐의 여부는 조직의 업적과 효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만일 커뮤니티에 당나귀가 있다면, 운영진은 마땅히 그 당나귀를 제거해야 한다. 만일 여러가지 이유로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묶어두어야 한다.

당나귀들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업무의 파괴에 그치지 않는다. 도자기가 부숴져도 다시 구워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당나귀가 계속하여 도자기들을 파괴하고 일을 방해한다면 장인들이 계속하여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하리라 기대해선 안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조직 자체의 와해로 향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 이를 거스르려 할 때 최고운영자는 조직 전체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 해악이 지대함에도 만약 당나귀를 제거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현재까지 주로 권한에 대해 논의해왔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항상 권한으로만 돌아가는것은 아니다. 지닌 권한의 적절한 행사법, 그것이 정당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도덕성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상호작용, 마지막으로 운영자 본인의 신념이나 최소한의 책임감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가급적 권한에 대해서만 논한 이유는 이러한 품성은 뛰어난 안목과 깊은 경험을 전제치 않고서는 성립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하는게 보다 옳은지에 대해 쉽게 판단내리지 못하며 그에 대해 깊게 생각치 못하고 처리하기 마련이다. 이제 권한 외의 부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어떠한 조직이 마련되어 충분히 돌아가려면 그 권한이 정해져야 함은 마땅하다. 많은 사람을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게 하는 방법의 하나는 명분이고 다른 하나는 권한이다. 훌륭한 명분은 다수의 사람에게 정신적 지주로서 작용하여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함과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의 열정을 최대의 효율로 뽑아내는데에 함께 필요한게 조직화된 권한이다.

그러나 운영자가 아무리 법규에 따라 훌륭한 운영을 하고, 권한을 통하여 일을 하여도 이를 통해 모든 해악을 걸러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간혹 법을 어기진 않으나 없는것이 더 나은 자가 있다. 그들은 법으로는 잡을 수 없는 해악이다. 법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골치가 아프다.

법규로서 이러한 해악을 잡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다수가 믿는 도덕이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 논한 바와 같이 다수가 믿는 올바름義이 실천되었을 때 항상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흐른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는 가장 훌륭한 학자들조차 대답하기 어려우며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 두번째 이유는 법규는 보편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혹한 커뮤니티가 선량한 회원에게도 가혹하기 쉽듯이 관대한 커뮤니티는 해악에게도 관대하기 쉽다. 만약 해악을 잡기 위해 회칙과 법제를 보완하면 그것은 마치 농약과도 같아서 해충을 잡는 만큼 작물에도 손상을 입힐 것이다. 이 일이 처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렇다고 하여서 해악을 방치한다면 해충이 곧 작물을 갉아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번째 이유는 조직이 반드시 권한만으로 돌아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조직이 상호관계와 신뢰에 기반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이는 양날의 칼이 되어 당나귀의 활동에 도움을 주게 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할 수록 상호간의 벽이 낮아지며 활발한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이것은 업무의 효율성에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다(만약 이러한 조직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자산인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열린 소통의 경로로 해악이 들어오면 순식간에 전체가 마비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조직에서 특정자를 쫒아낸다는 것은 다른 모두에게도 영향을 주기 쉬우며 조직의 가장 뛰어난 자산에도 손상을 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충을 줄일 것인가? 해충이 지나치게 들끓어 작물을 얻을 수 없는 지경이라면 모를까 단순히 저러한 해악이 소수 있다고 하여 약을 치지는 않는다. 법제는 보편적이기에 반드시 작물에도 손상이 가는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작물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해충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그들을 집게로 잡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약으로 처리할 수 없는 해충에 대한 최선의 방법이다.

이제 그 집게는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운영자 자신이 지닌 권위이자 신뢰이다. 권위는 거부를 거부하며 신뢰는 믿음으로 믿게한다. 최고운영자가 스스로의 그 공정함과 정당함을 행사했으며 직분에 걸맞은 행동을 취해왔다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법제의 측면에서 애매하다고 해도 회원들은 전례에 따라 운영자를 따를 것이다.

선으로 남을 이끄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고 남과 화합하는 것을 유순하다한다. 이에 반해 불선으로 남을 이끄는 것을 타락시킨다 하고 남과 화합하는 것은 아첨이라고 한다. 이 짧은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일컬어 유순하다고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일컬어 아첨한다고 할 수 있는지 판단내리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안다 해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흠.. 이거 제목이 뭐가 좋을까.)

사회과학
최근 정국은 상당한 혼란에 빠져있다. 특히 근 일년에 걸쳐 시내에서 시위대를 보는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시위를 함은 불만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은 경찰이다. 말 그대로 사회가 10년 전으로 돌아가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을 강력히 비난하는 것은 틀리지는 않았으나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명박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가 원인으로 생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해도 이처럼 온갖 공권력을 단번에 과거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현재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조직에 대해 생각해보자. 참여정부 시절, 농민시위에서 전용철, 홍득표 두 사람이 죽는 일이 있었다. 인권위에서는 경찰의 과잉진압이 원인이라고 했고, 이러한 조사가 발표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내며 사과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이 사과에 대해서는, 시위대가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힘들게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의 사기와 안전을 걱정하는 분들의 불만과 우려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권력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스스로 이러한 분위기로 몰아갔음에도 경찰에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남용될 경우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에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더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이러한 노력은 분명 옳은 방향이었을 것이다. 경찰도 인권위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노무현까지의 이야기이다. 이명박 대통령 이후로 경찰은 그야말로 폭주하고 있고 아我와 적敵을 갈라버렸다. 이는 공권력으로서 도저히 용납해서는 안될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도 그러하다. 당연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압박은 이명박에게 당연히 아무런 도움이 안됬고, 그가 바란 바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표적수사를 받고 결국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명박 대통령은 강력한 역풍을 받았다. 이미 부족한 도덕성이 그 숨통조차 끊겼다. 그렇다면 누가 원해서 노무현을 수사한 것인가?

지난 참여정부 5년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지나친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다시피 검사가 작정하면 사람 하나 잡는건 일도 아니다. 노 대통령은 민주화된 법제에서라면 이처럼 검찰에 권한이 집중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시행했다. 검찰은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항하였으나 어쨌건 대놓고 정권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물러나고 정권이 교체되고 나자 검찰은 보복했다. 그것도 스스로도 놀랄만큼 강력하게.

일련의 사태들이 보여주는 바는 명백하다. 이명박 정부가 검경을 포함한 각 조직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검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느냐는 일단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물론 어찌되었건 이명박은 대통령이고 그의 권한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검찰의 행동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지는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결국 임기제이고 오래갈 수 없다. 이명박은 자신이 물러난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가 검경에 대한 제한에 나선다면 그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현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있다. 레임덕은 흔히 임기말에 생기는 권력의 누수라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취임 1년만에 이명박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이례적일수는 있으나 놀랄 일은 아니다.

반드시 행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가 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두 기관이 그야말로 모든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혼란에 빠져있다. 검찰이 이례적으로 폭주하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경찰조직도 불명확한 상부의 의지에 따르고 있는 쪽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정치권력이 무너졌는가?

이러한 문제를 다시 조망하기 위해 조금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보자. 과거에는 대통령의 권력이 매우 강력했다. 이를테면 전두환 당시 재계 7위에 올라있던 국제그룹 해체를 상기해보자. 대통령이 작정하면 재벌 하나쯤 날아가는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법계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고 국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흘렀다. 오늘날 대통령들은 독재시기만큼 강력하지 않다. 군인 출신들은 정치에서 물러났고 대통령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막걸리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아마 현재의 대통령이 어떤 재벌그룹(이를테면 S모라던가..)을 해체한다는건 상당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정치권력이 약화되는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크게 나쁜 일은 아니다. 시민들은 마땅히 자유로와야 하며 국가가 시민들의 그러한 자유로움을 부당히 제약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약화된 정치권력의 공백이 제대로 매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빈 자리에 곳에 들어온 것은 시민들도 아니었고 민중도 아니었다. 재벌권력이 정치권력을 조롱하고 사법권력과 영합하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보면 독재 대통령보다도 훨씬 질이 나쁘다. 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정치권력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그 본래 가져야 할 통제력을 다시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치권력이 약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옛 군부독재시대라면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군부시대 대통령은 그렇게 권력을 잡았고 또한 그것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그렇지는 않다. 민주사회에서는 마땅히 인민의 지지를 얻는 자가 권력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현 정치세력 중에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가? 집권당인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대통령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보자.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것도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하는것도 아니다. 나라를 망치고 싶어하는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그저 바라는 것도 없고 목적하는 것도 없을 뿐이다.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고 긴 안목도 없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고 있다. 하나의 정책조차 만들 능력이 없다. 말 그대로 단순한 잉여다.

지난 대선을 다시 떠올려보자. 지금 보아도 이명박 당시 후보가 내놓았던 공약은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한편으론 진부하기까지 했었다. 이 얼마나 건설(!)적이고 시대착오적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선된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른 후보들은 이명박 만큼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동영 후보를 포함해서 다른 야당 후보들은 사실상 아무런 그림도 제시하지 않았다. 자신이 뭘 하겠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말할 만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갑자기 삼수를 선언한 이회창 후보도 그러했고 민노당조차도 스스로의 공약으로 무능함과 멍청함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선 오히려 이명박 대통령을 능가하기까지 했다. 인민들은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대안도 없었다.

과거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하나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조국의 근대화였다. 부당한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고, 구미, 일본만큼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이 기치를 위해 실제로 얼마만큼 행동하였고 얼마만큼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이 표현하는 바는 아직도 그가 현대 한국에 드리운 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정희는 국민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제시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민주사회로 이행한 후 나타난 정치인들이 옛 독재시대 만큼도 국민들에 미래를 제시치 못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의미에선 기묘하기까지 하다.

오늘날까지도 박정희라는 존재와 그가 내건 슬로건이 유효한 이유는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아무런 것도 등장하지 않음이 한 원인이다. 이명박 후보는 이처럼 모든 정치인이 목적을 잃고 해매는 그 중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비젼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이 어떻게 해야 옳은 선거가 되었을까. 선거를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제도는 제도만으로 유지되는게 아니다.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그리고 제도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과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절차적 정당성이 국민의 뜻에 반하는 무능한 대통령을 방어하는 개념이 되어버린 이유는 이에 있다.

맹자 순자의 성선·성악설

사회과학/철학
제목을 써놓고 보니 웬지 좀 이상한 촌티가 나는데 왜 이럴까요 (..)

여튼 가끔 나오는 떡밥인지라 한번 써봅니다.


흔히 많은 사람은 성선설은 맹자孟子에 의해, 그리고 성악설은 순자에 의해 제창되었다고 보고있는데... 이러한 의견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나 아주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건 뭐랄까.. 명칭이 실체를 왜곡시키는 경우랄까요? 성선설이라던가 성악설일는건 말 그대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혹은 악하다 라는 설에 대해 말하는 것 처럼 들리니까요.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분명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있긴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먼저 이해해야 하는것은 이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의함이 자연주의라거나 인본주의라거나 하는 사상이 중심이 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가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사상의 주요한 특징은 치도(治道)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림治은 통제한다거나 명령한다거나 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크게 평천하(平天下)..라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치도라 함은 결국 인치(人治 : 사람에 의한 다스림)이며 동시에 치인(治人 : 사람을 다스림)이지요.

현 세태에 문제가 있으면 그 세태를 보다 '좋은'상태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사상적 논의는 이미 춘추시대부터 활발하게 제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옛 춘추시대의 사상이나 통치론들이 정작 현실의 개선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게 분명해지면서 단순히 사상적 문제를 넘어 이것을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접목시킬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지요. 인간을 특정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하려면 그 인간의 본성이 어떤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면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장자壯子 중에 보면 '혀가 맛있는 것을 찾고 눈이 아름다운 것을 쫒으며 손이 부드러운 것을 만지고자 하는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네놈은 무엇을 안다고 이에 반反할 것을 지껄이느냐?'라면서 공자에게 설교하는 도적이 나오지요(이야기중의 공자는 혼비백산해서 도망갑니다. -_-a).

맹자와 순자의 성선, 성악설도 본래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우선 맹자는 공자의 인仁 사상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공자는 인仁은 곧 애(愛 : 사랑)라고 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연스레 생기는 정, 특히 친육에 생기는 서로의 애愛를 사회에 반영할 것을 주장했다. 맹자는 공자의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서 자연스러운 인간 사이의 친애親愛를 사회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이 묵가의 차별없는 인애人愛와 같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혈육에게나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나 같은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묵가의 주장에 맹자의 반응은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놈'이었죠(이거 제가 과장한게 아니라 정말 맹자에 저렇게 나와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은 가까운 사람들(특히 부모와 자식)부터 시작해서 차등적으로 사람을 대할 수 밖에 없다는게 맹자의 주장이었죠. 지금 이 순간에서도 어디선가는 죽어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걸 모두 애도하지는 않듯이.

(약간 벗어난 이야기지만 유가에서 효孝를 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라도 혈육이 가장 가깝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게 부모자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가장 가까운 부모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자라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제대로 형성할 수 없으니 결국 천하에 사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전제조차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맹자의 주장을 인간이 대책없이 착한 존재라 말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맹자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집니다. 맹자는 전국시대 중기라는 시대에 산 사람이고 음모가 난무하는 궁중에서 지낸 적이 있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맹자는 인간이 착하기만 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며, 인간의 본성에는 당연히 악하게 흐를 욕망도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맹자가 주장한것은 인간은 '바른 방향으로 자랄 수 있는 씨앗'이 내재되어 있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일종의 가능성에 가깝지요. 당연히 커갈수록 이러한 가능성들은 파괴되거나 왜곡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이것을 바탕으로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라 하여 성선설을 인의설人義說로 발전시켰고, 나아가 정치에 이를 접목하여 왕도王道정치를 제창했다. 군왕은 이러한 인간본성人心에 입각하여 다스려야 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하면서 도덕을 가르쳐야 한다는 등 철저한 민본주의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의 명칭이 성선설로 굳어지면서 이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정해집니다. 후대에 이르러 이름名이 몸實을 비틀어버린 것이랄까요.


맹자를 보았으니 이번엔 순자를 보아야겠지요. 순자는 '사람의 성性은 악하며 선한 것은 위爲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성性은 인간이 유전적, 생물학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을 말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졸리면 잠자리를 찾고, 색을 알면 이성을 찾고, 추우면 입을 것을 찾는 이러한 본성은 도덕이라거나 인이라거나 예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인간이라도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순자는 이것 자체가 명백한 악惡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흔히 사회적으로 말하는 악함의 방향으로 작용하기 쉽다는 것을 주장한 것에 가깝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이득을 좋아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쟁탈이 생긴다.'에서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요. 누구나 먹고 싶어하고 누구나 호화로운 집을 원하지만 모두가 그런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쟁탈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지요.

순자의 이에 대한 해결책은 교육입니다. '선한 것은 위爲이다.'에서 잘 드러나지요. 위爲라는건 인위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태어나서부터의 본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을 통하여 그 선함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 쯤 되면 순자와 맹자의 주장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를 사랑하고 결혼하면 처자를 사랑한다'는 맹자의 글은 '색을 알면 여자를 찾는다'는 순자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실 맹자와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어디까지나 평천하를 위한 학문으로 논한 것이며 그들의 주장은 이것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