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의 문관숙청
중국中國/명明Prologue
명(明) 홍무(洪武) 12년, 좌승상(左丞相) 호유용(胡惟庸)은 사소한 몇가지 실수(형사사건과 행정과실)로 인해 추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발이라도 맞춘 듯 누군가 나타나서 호유용이 모반했다고 고변했다. 이것이 이른바 '호유용 사건'으로, 조정의 가장 큰 권신이자 중서성(中書省)의 수장이던 호유용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십년간 홍무황제(洪武皇帝)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며 수만 이상이 이에 연루되어 죽어나갈 것이었다.
왕조가 바뀔 때 마다, 혹은 군왕이 바뀔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중국 역사에선 상당히 흔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단연 돋보인다. 호유용 사건과 남옥(藍玉) 사건에 연루되어 개국 공신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태조의 손에 살육되었다. 그리고 그 외의 기간에도 결코 적다할 수 없는 관료들이 탐관오리라 하여 죽어나갔다. 황제의 손에 죽은 자는 적어도 수만, 많이 추산하는 사람은 10만이 넘을거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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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성립된 이래, 봉건시대(封建時代)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천명을 받아 만백성을 통치했다. 황제는 스스로 짐(朕)이라 칭하여 영토와 공간을 지배함을 선언하고 연호(年號)를 정하여 시간조차 의지하에 두었다. 황제의 명령은 칙명(勅命)이라 하여 이를 받는 자는 황제를 대하듯 무릎을 꿇고 천자의 의지를 받들어야 했다. 이처럼 황제는 만인지상의 지고한 위치를 쥐고 절대권력으로 인민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상의 이야기였다. 황제가 아무리 위대해도 현실에는 벽이 있었다. 하늘의 아들이라던 황제들은 종종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제위를 박탈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거대한 중화대륙과 인민들은 통치자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역대 황제들의 고심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발전이라면 역시 송대(宋代)의 문치주의 확립일 것이다. 당대(唐代)까지만 해도 지방에 일일이 관료를 파견하여 다스리는게 어려웠기 때문에 중앙에서 먼 지역에는 현지의 행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는 절도사를 임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방식은 효율적으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중앙 정부에서 다스리는 방식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 절도사들은 얼마 안가 군벌로서 성립하여 중앙정부를 무시할 수준으로 강력해졌으며 결국 이후 당나라는 쇠락의 길로 향했다. 다시 전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왕조를 수립한 송태조 조광윤은 그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절도사들의 군권을 회수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문관집단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른바 사대부로 대표되는 이들 문관집단은 황제의 손발이 되어 중앙에서 지방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 문관들도 항상 황제를 따른 것은 아니다. 군벌시대의 절도사들이 호족의 지지를 받아 군대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다면 이들 관료집단에게는 학문이 곧 무기였다. 이들은 붕당을 형성해 상대를 몰아세웠으며 송대 수백년의 역사 동안 당파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잘 알려졌듯이 주원장은 빈농출신이다. 때문에 당시 농민의 상황을 잘 알았다. 농민은 작은 땅을 일구며 평생 부지런히 일해도 굶주림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관리들은 수탈과 직위보존에만 급급하였고 지주나 유력자들과 얽혀 농민을 착취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주원장은 이들 신사층과 관료들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을 수 밖에 없었다. 일찍이 홍건적은 봉건황조의 개국이 아니라, 명왕출세와 미륵강생을 기반으로 하는 명교-미륵교 의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봉건왕조를 세워 황제가 되자 주원장은 깨달았다. 관료와 지역의 신사층은 제국 통치의 필수요소임을. 봉건제국의 황제는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았으며 제국을 통치하려면 반드시 호족들과 지방유력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를 걷고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게나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세가 너무 적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다. 조세가 불균형하면 국가는 내부로부터 붕괴된다. 때문에 건국자들과 그 후손들이 국체(國體)를 정비할 때는 반드시 조세제도가 포함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세를 균형있게 걷을 수 있는가?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이가 지닌 부(富)와 생산하는(혹은 미래에 생산할)재화(財貨)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양을 걷으면 그것만으로도 균형있게 세금이 분배되므로 호구조사만 제대로 되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에 착안되어 만들어진 것이 중국 북위(北魏) 이래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약 300년간 시행된 균전제(均田制)이다. 한(漢)이 멸망한 이후 농민들이 땅을 잃고 자영농들이 급속히 몰락하는 동안 호족들이 그 땅을 얻어 대토지를 보유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호족들이 대토지는 지니면 농민이 살 땅이 없어진다. 그러면 국가로서는 세금을 걷을 대상과 병역을 지울 대상을 잃게 된다. 또한 호족이 지역의 실권을 잡으면 군주권은 위험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균전제를 통하여 역대 황조들은 최대한 영토를 재분배하려고 노력했다(실효는 의문스럽지만).
원말 농민봉기는 상당수의 몽한 대지주들을 몰락시켰다. 특히나 중원지역과 화북지역은 전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지주계급이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강남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대명의 근거지였던 회서에는 오히려 수많은 신흥 지주가 생겼으며 이들이 초기 대명황조의 지배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은 홍무제에게 껄끄러운 일이었다. 이 빈농출신의 건국황제는 원말명초의 전쟁을 거치면서 회서출신의 호족과 지주의 조력으로 제국을 세웠다. 건국 공신들의 대부분, 그리고 제국 통치 기구의 주요 요직을 이들 회서인들이 차지했다. 이제 황제는 불안해졌다 : 내가 살아있을 때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약한 황태자 주표(朱標)가 저들 회서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공신들이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전횡하는게 아닐까?
황태자가 1392년 4월에 38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먼저 사망하자 어린 황손(주윤문朱允? : 후일의 건문제建文帝)이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었다. 이 황손을 보며 노황제는 결심했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구오지존으로서 황제가 천하의 중심이 되길 바랬으며 누구도 황제에게 대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지녔다. 그러나 그 황제의 통치가 저들 봉건지주들에게 지탱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명나라는 회서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의 나라임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회서인들을 포함한 지주들을 몰락시킨다면 이제 제국을 무엇으로 통치할 것인가? 그것은 과거시험을 거쳐 전국으로부터 뽑힌 관료들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은 긴 공부가 필요한 일이며 그 준비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지주계급,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농은 되어야 했다. 이는 대명이 건립되었던 최초의 과거에서 합격자의 대부분을 (상대적으로 전란이 적어 대지주의 몰락도 없었던) 강남출신들이 차지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맞서 홍무제는 제국 토지의 재분배를 했다. 다만 그것은 옛 북조(北朝)가 썼던 방법보다 훨씬 가혹한 방법을 통해 단기간 내에 이루어졌다. 주원장이 바란 세상은 대지주를 몰살시키고 그 땅을 자영농과 소지주들에게 분배하여 농민의 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강남 지주들은 호유용 사건과 남옥 사건에 연루되어 대규모로 죽어나갔다. 주원장에 의해 재산을 모두 잃고 운남으로 쫒겨나갔다는 강남 최고 부자 심만삼(沈萬三 : 실제 심만삼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죽었다)의 이야기는 실제 당시 강남에 있었던 수많은 지주들이 당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사회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회서인이나 신사층으로부터의 조력이 없이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관이 신사층에서 충당되는 구조는 황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당시의 관료기구의 미비함은 관료들의 인원 충당 뿐 아니라 실제 행정의 집행에서도 신사층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대부분의 문관들은 이에 딱히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명 조정의 행정적 능력과 제도로는 이들 관료들을 충분히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으며, 관료만으로 국가적 정책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
이들 문관 집단은 이중성을 지녔다. 그들은 유학을 배웠으며 어렸을 때부터 이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들의 도덕적 원칙에 충실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이익을 찾아 상인들이 곳곳으로 움직이는걸 한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자기모순으로 상업과 경제의 발전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도 그들 문관이며 신사층이었다. 명대 중기를 넘어서면 이미 대부분의 관료들은 번영하는 상업사회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기도 전에 그가 바랬던 세상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남자는 농사를 하고 여자는 집에서 길쌈하는 시대'는 이미 당시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명나라의 역사는 경제의 놀라울 만한 변화와 이를 어떻게든 쫒아가려 했던 조정의 노력이기도 하다. 흔히 홍무제의 강력한 농본정책으로 인해 명나라가 상공업을 억제하려 했다는 이미지가 정착되어있으나 실제 명나라 조정이 상업의 발전을 엄밀하게 금지하려 했던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명나라는 상업의 발전을 최대한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과 거대한 관료조직이 따라가기엔 대륙의 변화는 너무 빨랐다.
홍무제 사후, 명나라의 황제들은 결국 신사층과 타협하여 그들이 제국의 통치 요소임을 인정했다. 이후 농민의 천국은 사라졌고 잉여생산물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한다. 신사층과 이에 영합한 문관들은 비효율적인 국가제도의 틈과 허술한 행정망을 피해 막대한 재부를 쌓았고 명 조정은 결코 이것을 통제하에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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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명나라가 세워진지 2세기가 흘렀다. 정덕(正德), 가정(嘉靖) 연간을 거치며 명조의 재정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은 토지대장에서 빠지는 전토가 늘어나고 자영농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주요 문제로 지적했다. 부호들이 은닉한 토지를 찾기 위해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 측량을 시작했고 이로서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시행될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사층과 부호, 지주들의 반발은 강력했다. 장거정은 사후 관료들에 의해 탄핵당했고 그의 개혁은 후퇴했다. 만력 12년에 장거정의 죄상이 공표되었다. 이후 내각대학사에 임명된 신시행(申時行)은 문관집단의 수복에 들어갔다.
문관들은 이제야 황제를 그들이 원한 도덕율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관들의 도덕은 행정과 기술, 원칙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제국을 유지해주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문관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신시행은 만력제를 설득하여 장거정이 시행했던 효율성 위주의 행정방식을 폐기하고 전례없이 3대 중요부서인 이부, 도찰원, 한림원의 관리를 유임시키는데에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황제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당시 내각대학사 신시행이 문관의 편을 들며 황제를 제약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황제와 문관 집단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했으며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는데에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벌어지고만 있었다. 황태자 책봉 문제에서 보여진 문관과 황제의 의견충돌은 이후 명나라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처럼 문관집단의 반발에도 부룩하고 만력제는 그의 선조였던 홍무제처럼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할 수도 없었으며 영락제(永樂帝)처럼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치제(弘治帝)처럼 문관들과 조화하는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서 소심하게 자랐으며 항상 제국의 후계자로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만력제는 죽을 때 까지 그의 정신에 가해진 금제를 헤어나지 못했다. 황태자의 책봉문제에서 황제가 보인 태도는 졸렬하기까지 했다.
만력 15(1587)년, 신시행은 요동순무가 보낸 참정의 탄핵안을 처리 해야 했다. 요동순무는 건주위(建州衛)의 추장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주변 부족을 통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우환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출병하고자 했으나 부하인 개원도참정(開原道參政)이 유화책을 주장하며 군대의 출동을 거절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정을 탄핵하는 순무의 상주가 북경에 도착하자 감찰관들은 오히려 참정의 사적 주장이 옳다하며 순무를 탄핵했다. 신시행은 여기서도 그 특유의 유화적인 방안을 내놓아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사소한 일로 문무의 불화를 야기하지 않는게 상책이라 판단한 신시행은 서로가 탄핵했으니 이 일은 더이상 거론치 않는것이 옳다고 황제에게 상주했다.
이전 몽골에 대한 처리에서도 그랬듯이 문관들은 무관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유화책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만약 신시행이 조금 더 이 일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는 당시 만주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건주위의 추장,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이름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명(明) 홍무(洪武) 12년, 좌승상(左丞相) 호유용(胡惟庸)은 사소한 몇가지 실수(형사사건과 행정과실)로 인해 추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발이라도 맞춘 듯 누군가 나타나서 호유용이 모반했다고 고변했다. 이것이 이른바 '호유용 사건'으로, 조정의 가장 큰 권신이자 중서성(中書省)의 수장이던 호유용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십년간 홍무황제(洪武皇帝)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며 수만 이상이 이에 연루되어 죽어나갈 것이었다.
왕조가 바뀔 때 마다, 혹은 군왕이 바뀔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중국 역사에선 상당히 흔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단연 돋보인다. 호유용 사건과 남옥(藍玉) 사건에 연루되어 개국 공신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태조의 손에 살육되었다. 그리고 그 외의 기간에도 결코 적다할 수 없는 관료들이 탐관오리라 하여 죽어나갔다. 황제의 손에 죽은 자는 적어도 수만, 많이 추산하는 사람은 10만이 넘을거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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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성립된 이래, 봉건시대(封建時代)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천명을 받아 만백성을 통치했다. 황제는 스스로 짐(朕)이라 칭하여 영토와 공간을 지배함을 선언하고 연호(年號)를 정하여 시간조차 의지하에 두었다. 황제의 명령은 칙명(勅命)이라 하여 이를 받는 자는 황제를 대하듯 무릎을 꿇고 천자의 의지를 받들어야 했다. 이처럼 황제는 만인지상의 지고한 위치를 쥐고 절대권력으로 인민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상의 이야기였다. 황제가 아무리 위대해도 현실에는 벽이 있었다. 하늘의 아들이라던 황제들은 종종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제위를 박탈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거대한 중화대륙과 인민들은 통치자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역대 황제들의 고심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발전이라면 역시 송대(宋代)의 문치주의 확립일 것이다. 당대(唐代)까지만 해도 지방에 일일이 관료를 파견하여 다스리는게 어려웠기 때문에 중앙에서 먼 지역에는 현지의 행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는 절도사를 임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방식은 효율적으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중앙 정부에서 다스리는 방식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 절도사들은 얼마 안가 군벌로서 성립하여 중앙정부를 무시할 수준으로 강력해졌으며 결국 이후 당나라는 쇠락의 길로 향했다. 다시 전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왕조를 수립한 송태조 조광윤은 그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절도사들의 군권을 회수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문관집단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른바 사대부로 대표되는 이들 문관집단은 황제의 손발이 되어 중앙에서 지방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 문관들도 항상 황제를 따른 것은 아니다. 군벌시대의 절도사들이 호족의 지지를 받아 군대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다면 이들 관료집단에게는 학문이 곧 무기였다. 이들은 붕당을 형성해 상대를 몰아세웠으며 송대 수백년의 역사 동안 당파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잘 알려졌듯이 주원장은 빈농출신이다. 때문에 당시 농민의 상황을 잘 알았다. 농민은 작은 땅을 일구며 평생 부지런히 일해도 굶주림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관리들은 수탈과 직위보존에만 급급하였고 지주나 유력자들과 얽혀 농민을 착취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주원장은 이들 신사층과 관료들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을 수 밖에 없었다. 일찍이 홍건적은 봉건황조의 개국이 아니라, 명왕출세와 미륵강생을 기반으로 하는 명교-미륵교 의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봉건왕조를 세워 황제가 되자 주원장은 깨달았다. 관료와 지역의 신사층은 제국 통치의 필수요소임을. 봉건제국의 황제는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았으며 제국을 통치하려면 반드시 호족들과 지방유력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를 걷고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게나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세가 너무 적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다. 조세가 불균형하면 국가는 내부로부터 붕괴된다. 때문에 건국자들과 그 후손들이 국체(國體)를 정비할 때는 반드시 조세제도가 포함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세를 균형있게 걷을 수 있는가?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이가 지닌 부(富)와 생산하는(혹은 미래에 생산할)재화(財貨)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양을 걷으면 그것만으로도 균형있게 세금이 분배되므로 호구조사만 제대로 되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에 착안되어 만들어진 것이 중국 북위(北魏) 이래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약 300년간 시행된 균전제(均田制)이다. 한(漢)이 멸망한 이후 농민들이 땅을 잃고 자영농들이 급속히 몰락하는 동안 호족들이 그 땅을 얻어 대토지를 보유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호족들이 대토지는 지니면 농민이 살 땅이 없어진다. 그러면 국가로서는 세금을 걷을 대상과 병역을 지울 대상을 잃게 된다. 또한 호족이 지역의 실권을 잡으면 군주권은 위험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균전제를 통하여 역대 황조들은 최대한 영토를 재분배하려고 노력했다(실효는 의문스럽지만).
원말 농민봉기는 상당수의 몽한 대지주들을 몰락시켰다. 특히나 중원지역과 화북지역은 전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지주계급이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강남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대명의 근거지였던 회서에는 오히려 수많은 신흥 지주가 생겼으며 이들이 초기 대명황조의 지배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은 홍무제에게 껄끄러운 일이었다. 이 빈농출신의 건국황제는 원말명초의 전쟁을 거치면서 회서출신의 호족과 지주의 조력으로 제국을 세웠다. 건국 공신들의 대부분, 그리고 제국 통치 기구의 주요 요직을 이들 회서인들이 차지했다. 이제 황제는 불안해졌다 : 내가 살아있을 때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약한 황태자 주표(朱標)가 저들 회서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공신들이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전횡하는게 아닐까?
황태자가 1392년 4월에 38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먼저 사망하자 어린 황손(주윤문朱允? : 후일의 건문제建文帝)이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었다. 이 황손을 보며 노황제는 결심했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구오지존으로서 황제가 천하의 중심이 되길 바랬으며 누구도 황제에게 대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지녔다. 그러나 그 황제의 통치가 저들 봉건지주들에게 지탱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명나라는 회서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의 나라임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회서인들을 포함한 지주들을 몰락시킨다면 이제 제국을 무엇으로 통치할 것인가? 그것은 과거시험을 거쳐 전국으로부터 뽑힌 관료들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은 긴 공부가 필요한 일이며 그 준비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지주계급,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농은 되어야 했다. 이는 대명이 건립되었던 최초의 과거에서 합격자의 대부분을 (상대적으로 전란이 적어 대지주의 몰락도 없었던) 강남출신들이 차지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맞서 홍무제는 제국 토지의 재분배를 했다. 다만 그것은 옛 북조(北朝)가 썼던 방법보다 훨씬 가혹한 방법을 통해 단기간 내에 이루어졌다. 주원장이 바란 세상은 대지주를 몰살시키고 그 땅을 자영농과 소지주들에게 분배하여 농민의 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강남 지주들은 호유용 사건과 남옥 사건에 연루되어 대규모로 죽어나갔다. 주원장에 의해 재산을 모두 잃고 운남으로 쫒겨나갔다는 강남 최고 부자 심만삼(沈萬三 : 실제 심만삼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죽었다)의 이야기는 실제 당시 강남에 있었던 수많은 지주들이 당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사회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회서인이나 신사층으로부터의 조력이 없이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관이 신사층에서 충당되는 구조는 황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당시의 관료기구의 미비함은 관료들의 인원 충당 뿐 아니라 실제 행정의 집행에서도 신사층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대부분의 문관들은 이에 딱히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명 조정의 행정적 능력과 제도로는 이들 관료들을 충분히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으며, 관료만으로 국가적 정책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
이들 문관 집단은 이중성을 지녔다. 그들은 유학을 배웠으며 어렸을 때부터 이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들의 도덕적 원칙에 충실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이익을 찾아 상인들이 곳곳으로 움직이는걸 한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자기모순으로 상업과 경제의 발전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도 그들 문관이며 신사층이었다. 명대 중기를 넘어서면 이미 대부분의 관료들은 번영하는 상업사회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기도 전에 그가 바랬던 세상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남자는 농사를 하고 여자는 집에서 길쌈하는 시대'는 이미 당시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명나라의 역사는 경제의 놀라울 만한 변화와 이를 어떻게든 쫒아가려 했던 조정의 노력이기도 하다. 흔히 홍무제의 강력한 농본정책으로 인해 명나라가 상공업을 억제하려 했다는 이미지가 정착되어있으나 실제 명나라 조정이 상업의 발전을 엄밀하게 금지하려 했던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명나라는 상업의 발전을 최대한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과 거대한 관료조직이 따라가기엔 대륙의 변화는 너무 빨랐다.
홍무제 사후, 명나라의 황제들은 결국 신사층과 타협하여 그들이 제국의 통치 요소임을 인정했다. 이후 농민의 천국은 사라졌고 잉여생산물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한다. 신사층과 이에 영합한 문관들은 비효율적인 국가제도의 틈과 허술한 행정망을 피해 막대한 재부를 쌓았고 명 조정은 결코 이것을 통제하에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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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명나라가 세워진지 2세기가 흘렀다. 정덕(正德), 가정(嘉靖) 연간을 거치며 명조의 재정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은 토지대장에서 빠지는 전토가 늘어나고 자영농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주요 문제로 지적했다. 부호들이 은닉한 토지를 찾기 위해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 측량을 시작했고 이로서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시행될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사층과 부호, 지주들의 반발은 강력했다. 장거정은 사후 관료들에 의해 탄핵당했고 그의 개혁은 후퇴했다. 만력 12년에 장거정의 죄상이 공표되었다. 이후 내각대학사에 임명된 신시행(申時行)은 문관집단의 수복에 들어갔다.
문관들은 이제야 황제를 그들이 원한 도덕율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관들의 도덕은 행정과 기술, 원칙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제국을 유지해주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문관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신시행은 만력제를 설득하여 장거정이 시행했던 효율성 위주의 행정방식을 폐기하고 전례없이 3대 중요부서인 이부, 도찰원, 한림원의 관리를 유임시키는데에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황제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당시 내각대학사 신시행이 문관의 편을 들며 황제를 제약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황제와 문관 집단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했으며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는데에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벌어지고만 있었다. 황태자 책봉 문제에서 보여진 문관과 황제의 의견충돌은 이후 명나라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처럼 문관집단의 반발에도 부룩하고 만력제는 그의 선조였던 홍무제처럼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할 수도 없었으며 영락제(永樂帝)처럼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치제(弘治帝)처럼 문관들과 조화하는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서 소심하게 자랐으며 항상 제국의 후계자로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만력제는 죽을 때 까지 그의 정신에 가해진 금제를 헤어나지 못했다. 황태자의 책봉문제에서 황제가 보인 태도는 졸렬하기까지 했다.
만력 15(1587)년, 신시행은 요동순무가 보낸 참정의 탄핵안을 처리 해야 했다. 요동순무는 건주위(建州衛)의 추장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주변 부족을 통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우환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출병하고자 했으나 부하인 개원도참정(開原道參政)이 유화책을 주장하며 군대의 출동을 거절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정을 탄핵하는 순무의 상주가 북경에 도착하자 감찰관들은 오히려 참정의 사적 주장이 옳다하며 순무를 탄핵했다. 신시행은 여기서도 그 특유의 유화적인 방안을 내놓아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사소한 일로 문무의 불화를 야기하지 않는게 상책이라 판단한 신시행은 서로가 탄핵했으니 이 일은 더이상 거론치 않는것이 옳다고 황제에게 상주했다.
이전 몽골에 대한 처리에서도 그랬듯이 문관들은 무관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유화책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만약 신시행이 조금 더 이 일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는 당시 만주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건주위의 추장,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이름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