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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제국의 몰락 (2)

중국中國/명明
장거정張居正은 중국 4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5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이미 진사가 되었다. 이 시기는 명나라가 건국되고 이미 150년이 흐른 때로, 제국의 많은 부분에서 노화와 병폐가 쌓여가고 있었다. 장거정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가 되자 『진육사소(陳六事疏)』라는 행정개혁에 관한 글을 지어 황제에게 올렸다.

① 공론을 줄일 것. 곧 모든 일에 헛된 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도록 한다.
② 기강을 잡을 것. 곧 관직의 수여와 형벌을 공명정대하게 하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서는 안 된다.
③ 명령을 중시할 것. 곧 조정의 교지나 칙명이 잘 행해지도록 한다.
④ 명실상부할 것. 곧 인재를 신중히 헤아려 작위나 상을 내리고 이부에서는 관리를 성실히 고과하여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도록 한다.
⑤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 곧 나라의 풍속이 사치스럽고, 재부와 권력이 균등히 배분되지 않고 편중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이러한 작태를 청사하도록 한다.
⑥ 군비를 바로 갖출 것. 곧 군사와 변방의 관리를 정선하고 훈련을 강화하며, 군의 기강과 군비 확충에 주력하면 국방은 저절로 공고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후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어떤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될 것인지 알려주는 서막이었다. 융경제가 서거하고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장거정은 사실상의 독재를 확립하고 강력한 권한으로 개혁을 시행해 나갔다. 장거정은 국고를 튼튼하게 하고 재정을 강화하는 한편, 기존까지 행정적 효율성이 결여되어 있던 관료기구에도 손을 대어 성과 위주의 인사제도를 채택했다.

장거정은 우선 관료들의 효율성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관료조직은 과거로 인해 뽑혔지만 그들을 유지하는 것은 인맥과 친분, 그리고 도덕상의 규율이 주였다. 때문에 그 효율성은 심각하게 낮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장거정의 시대에 들어와 고과(考課)를 평가하기 위한 고성법考成法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통하여 관료조직의 효율성은 향상되었고 미납된 세금도 제대로 걷히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장거정은 몽골인과 무역을 재개하여 불만을 없애 남침을 줄였고, 동북지방은 건주위를 정벌하여 저항의 싹을 없앴으며, 서남의 좡족도 평정하는 등 제국의 외환을 없애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군사적 성과를 넘어서 명나라의 군조직 자체를 개선하여 이루어진 성과로, 군사훈련의 강화와 장교의 질 향상, 그리고 만리장성의 보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그의 최고 업적은 전국적인 측량과 일조편법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세입은 토지 위주였으나 정작 그 토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향신鄕紳들은 소유한 땅을 은닉하는 일이 다수였고 부과되는 세금도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장거정은 양세법을 폐기하고 일조편법을 시행하여 세금을 일원화하는 한편 이렇게 은닉된 토지를 대규모로 적발해내어 정부의 수입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거정의 개혁은 신사층과 부호, 지주들의 거대하고도 심대한 반발을 불러왔다. 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은 관료조직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신사층과 부호는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에 분노했다. 결국 장거정은 사후 관료들에 의해 탄핵당했고 그의 개혁은 후퇴했다. 만력 12년에 장거정의 죄상이 공표되었다. 이후 내각대학사에 임명된 신시행(申時行)은 문관집단의 수복에 들어갔다.

이 사건에 대해서 장거정이 잘났고 관료들이 잘못했다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장거정의 시대에 있었던 개혁들이 당시 관료집단의 인식에서 가능한 일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당시 문관들의 도덕은 행정과 기술, 원칙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제국을 유지해주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다. 효율은 재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정부가 만약 이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강력한 행정조직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방대한 관료집단과 봉건제도를 타파해야만 가능한 영역이었다.

당시 행정효율을 보기 위해서 장거정이 일조편법의 시범 케이스로 지정한 복건성을 예로 들어보자. 장거정은 이곳을 시작으로 해서 제국 전체의 세제를 재편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만력 6년에 복건성의 인구를 대대적으로 조사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황당하게 나온다. 홍무26년(1393년)의 전국인구조사시에 복건성은 81만5천여호(戶)에 391만6천여구(口)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난후에 이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은 겨우 51만5천여호, 173만8천여구에 불과하였다. 몇대가 내려온 다음에 호구가 오히려 60%정도 수준으로 감소된 것이다.

물론 정말 인구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재고해보건데, 그보다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은 조정이 그 지역의 인구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이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조직은 실제 업무보다는 도덕적 원칙에 의해 뽑혔고, 그 도덕적 원칙과 규범이 곧 제국을 통합하는 열쇠였으며 관료조직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이 도덕적 힘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명나라의 사회는 도덕적 원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게다가 그 도덕적 원칙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 황태자 책봉의 문제에 얽힌 만력제는 관료집단에 크게 분노하여 파업(이라기보단 가출에 가까운 행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중심 축을 잃은 문관집단과 황제 사이의 균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장거정의 개혁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명나라의 재정도 위태해졌다. 만력 3대정에 이르러 재정이 크게 부족해지자 황제는 전국에 환관을 파견하여 은광을 개발하고 무분별하게 세금을 걷어 문제를 타개하려고 했다. 이것은 명나라의 사회 균열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았다. 지배계층도 동요하기 시작했고 균열이 발생했다. 동림당東林黨이 탄생한 것이다.

만력제는 그의 선조였던 홍무제처럼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할 수도 없었으며 영락제(永樂帝)처럼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치제(弘治帝)처럼 문관들과 조화하는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서 소심하게 자랐으며 항상 제국의 후계자로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만력제는 죽을 때 까지 그의 정신에 가해진 금제를 헤어나지 못했다. 황태자의 책봉문제에서 황제가 보인 태도는 졸렬하기까지 했다.

만력황제가 죽고 난 뒤 이제 명나라는 도덕적 윤리규범의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만력 3정은 끝났지만 재정은 고갈되어있었고 만주족이 다시 발흥하였으며 민란도 거세어졌다. 이러한 양쪽의 적에 맞서서 제국은 군비를 확충하고 군대를 증원해야 했지만 이것은 명나라의 행정적 취약점을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북경이 함락된 1644년까지 군사들에게 지불되지 못한 급료만 해도 백은 수백만냥에 달했다. 호부에서는 재정 초과분을 평균하여 각 현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빈곤한 현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1632년에 지방정부의 기운(起運 : 중앙정부나 주둔군에게 수송하는 물품)체납율은 이미 50%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각 현의 내부적으로도 세금은 모든 납세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나마 일부 부유한 납세자들은 세금감면특권을 사용하여 빠져나가고 저소득 토지소유자들에게 전가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조편법에 의해 세금은 은으로 일원화되어 거두어졌다. 그 은의 대부분(약 2000만냥) 강남의 부유한 현에서 거두어졌고 그 중에 북경과 변방의 군대에 지급되는 양이 500만 냥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된 경제 순환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지급받은 지역은 강남에 비해 빈곤한 지역이었으며 때문에 이를 남방에서 생산된 면화와 면포 등의 구매에 사용되어 다시 남방으로 회수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회수 장치도 고장난다. 북방과 변경에 투입된 은이 회수되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고 은이 있어도 군비를 갖출 수가 없었다. 1619년 요양遼陽에서는 은을 가지고도 의류를 구입하지 못해 내의 없이 맨몸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있었다. 그나마 보내진 은들은 지휘관에 의해 착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력 연간은 명나라 역사의 전환점이다. 한세기 반에 걸쳐 축적된 모순들은 이 시기에 폭발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 문제에 직면하여 도전했고, 실패했다. 이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 대제국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엄청난 부가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었으며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군대가 곳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들이 굶주림을 참지 못해 민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물론 먹을 것이 있었다 해도) 자국의 촌락과 도시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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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가 자살하고 그 시체가 식기도 전에 이자성의 대순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처음 북경의 민중들은 그들을 환영했으나 이내 반란군들은 본색을 드러내 약탈을 시작했다. 대순군이 40여일 동안 북경에 있으면서 약탈한 재화는 백은만으로 3700만냥에 달했다. 오삼계와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패배한 농민군은 수레에 가득 재화를 담고 도주했다.

만력제가 죽고 아직 나이든 노인들이 그 장엄한 장례식을 기억하고 있을 때, 북경에 만청의 군대가 들어왔다. 이들도 명나라의 체제를 물려받았으며 과거시험을 시행했고, 도덕적 원칙으로 제국을 유지하였다. 강희, 옹정, 건륭에 걸친 강건성세를 거치면서 부유해진 청제국은 자신감에 넘쳐 탄정입무를 선언하였다. 청 조정은 잉여생산물을 거두어 그것으로 재투자한다는 생각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후로 조세는 오로지 토지에 부과되었고 사람에게 부과되지 않았다. 호구조사를 피할 필요가 없으니 전국적으로 정부장악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장거정의 시대로부터 200년이 흐른 후인 청나라 도광14년(1834년), 복건성은 여전히 재난이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었다. 그런데, 이 때의 복건성에 등록된 백성의 인구는 1500여만으로 급격히 불어난다. 200년전보다 9배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호구도 마찬가지로 7배가량 늘어나서, 전국인구는 놀라운 수준인 4억900만에 이르게 된다.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인구의 증가를 태평성세의 증거라며 자축했다.

대명제국의 몰락 (1)

중국中國/명明
지난 17년동안 숭정제는 어떻게 해서든 왕조의 몰락을 막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지난 세기동안 쌓여온 모순은 마치 운명과도 같이 명나라와 황제를 덮쳤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일어날 일이라기보단 이미 일어난 일과 같이 느껴졌다.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대순大順 농민반란군은 북경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2월에 대순군의 격문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자신만만한 이자성은 3월 15일까지는 북경에 도착할 것임을 천명했다.

황제는 급히 오삼계에게 근왕을 명령하려 했지만 이에 필요한 군자금조차 부족했다. 당시 호부에 남은 돈은 40만냥에 불과했다. 절박해진 숭정은 신하들에게 가진 재산의 일부라도 기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집안이 힘들다 말하며 최대한 이를 회피하려고 했다. 어떤 자는 50만냥의 재산이 있었지만 기껏해야 3천냥만 기부했을 뿐이었으며, 12만냥을 지닌 환관이 1만냥을 내놓은 것은 대단한 편에 속했다. 100만냥의 군자금이 필요했지만 모인 돈은 턱없이 20만냥 뿐이었다.

3월 17일에 대순군은 이미 제국의 심장부까지 도달했다. 황궁에까지도 전쟁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회도 열리지 않았으며 어느 문무백관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친히 종을 울려 백관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태감이 홀로 있는 황제를 보고 놀라 다가왔다. '이미 내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황상께서는 속히 떠나십시오', '대영병은 어디있는가?' '대영병은 이미 흩어졌습니다.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말을 마친 태감도 급히 몸을 돌려 도망갔다.

그가 즉위하기 전, 전대의 황제인 천계제는 17살난 다섯째 동생 주유검朱由檢을 불렀다. "다섯째 동생은 요순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 이 최후의 황제는 느꼈다. 대명왕조는 이미 끝났음을. 이제 그는 남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황제는 황후비빈들을 불러 스스로 정리하게 하였다. 어떤 이들은 통곡하고 어떤 이들은 허리띠를 풀러 자진하였다. 15세의 공주는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숭정도 비통을 금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말했다. '너는 어쩐 일로 우리 집안에 태어난 것이냐?' 그는 말을 마치고 왼손으로 얼굴을 가린체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이후 아직 숨이 붙어있는 비빈들을 내려친 황제는 매산煤山(혹은 만세산萬歲山)에 올라가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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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중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진한 황제라면 누가 뭐라 해도 홍무제가 제일로 꼽힐 것이다. 명대에 이르려 조정은 대륙 전체를 통괄할 행정체계를 마련하려 했으며 그 덕분에 명나라는 중앙이 전국 각지의 수많은 현의 임명권과 그들의 급료 인상분까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과 비교하면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명나라가 관료체계가 발달했다고는 하나 이것은 명분상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 중앙정부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숫자를 한자로 적을 때, 一, 二, 三, 四, 五, 六, 八, 九, 百, 千라고 한다. 그러나 회계에서는 숫자를 적을 때 일반적인 한자를 쓰는게 아니라 壹, 貳, 參, 肆, 伍, 陸, 柒, 捌, 玖, 拾, 佰, 仟식으로 된 대사숫자大寫數字를 쓴다. 이렇게 쓴 이유는 간단하다. 장부의 조작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정이 관료조직을 통솔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려주는 한 예이다.

주원장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계를 위해 호유용, 남옥사건을 일으키고 그 외에도 수많은 공신과 관료를 숙청해야 했는데 이같은 피비린내나는 과정은 잠재적 찬탈자들의 물리적 제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로서 정부에 반항하는 자들, 혹은 백성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를 심리적으로 통제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기도 하다(물론 홍무제 개인의 성격도 충분히 이에 관여했을 것이다).

때문에 홍무제는 탐관오리를 깔끔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주기보단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 공포심을 느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혹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장을 꺼내놓는것이나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물론이며 가장 심한 것으론 박피실초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탐관오리의 가죽을 벗기고 그 안에 풀을 채워놓는 것으로, 관청 옆에 세워두고 후임자들이 보고 있을 수 있도록 했다.

홍무제는 또한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법률을 제정하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최대한 보급하려 노력했다. 또한 부정부패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를 크게 알려 모두가 따르도록 하려했다. 그리고 도찰원이라는 감사기구를 만들어 왕공부터 최하급 관리까지 감시하고 탄핵할 권한을 주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수많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닥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홍무제는 이를 개탄하여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아침에 탐관오리를 가득 죽이면 저녁에 어떤 자가 또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죽는것도 두렵지 않고 부패를 저지른단 말인가?" 이 지경에 이른다면 형벌이 부족함이 원인이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인가? 명나라 조정은 어째서 이를 뿌리뽑지 못한 것인가?

홍무제 시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중국은 매우 넓다. 그래서 지방에서 걷은 세곡을 중앙으로 옮기는 데에는 많은 손실이 들었으며, 출발지에서 보낸 세곡과 도착지에서 받은 세곡의 양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하는 정도의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때문에 당시 수송을 책임진 관료들은 장부에서 출발지에서 보낸 세곡량을 비워두었다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 도착한 양을 보고 여기에 맞추어 기록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안 홍무제는 크게 분노했고 해당 관료들을 처결하며 더 이상 저러한 관행을 할 수 없도록 막으려 했다. 문제는, 이것은 단순히 관료들이 부패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홍무제가 담당자들을 아무리 강하게 처벌해도 문제가 나아지지 않던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이것이다. 황제가 지고무상의 권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 권력을 휘둘러 할 수 있는건 부패가 확인된 관료들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 고작이었다(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매우 끔찍한 일이었겠지만). 어디까지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디까지가 부패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중앙정부가 법령을 공포하는 것은 그것을 따르게 할 실질적인 방법이 없는 한 단순한 도덕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현대인들은 이 시대 명나라의 체제를 보면서 대체 어째서 대례지의(大禮之議 : 세종 가정제때의 논란으로, 홍치제를 황고皇考로, 흥헌왕興獻王을 황숙부皇叔父로 하는 것이 옳으냐, 흥헌왕을 황고로, 홍치제를 황백고皇伯考로, 정덕제를 황형皇兄으로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있었던 논쟁)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도대체 왜 저런 쓸데 없는 규범이 국가조정을 뒤흔들어야 하는가?

일부 사람들은 단순히 '저러한 유교적 규범이 바로 당시 국가의 정당성 기반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따져보아야 하는것은 대체 저런 규범이 왜 국가를 규율할 정도로 중요시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이다. 정부란 국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기구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조직이지 집안 어르신들을 뭐라 부를지 결정하는 기구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배경에 놓고 보면 문제는 간단하다. 명나라의 조정은 행정적 기반이 너무 취약했던 것이다. 우리는 명나라가 2세기 반동안 상업혁명을 일으키고, 신대륙과 일본 등으로부터 엄청난 귀금속을 얻고, 경제를 유례없이 발전시켜 인구가 증가했음에도 재정수입은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경제의 발전을 조정에서 통합할 방법이 없음을 증명한다.

이 시대 대륙은 단일한 중앙정부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부는 대륙을 일관되게 다스릴 수 없었다. 이것도 사실이다.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중앙은 지방의 모든 권한을 지녔지만 가장 기본적인 재산권의 보장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농민은 부당하게 토지를 침탈당했고 지주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소작농에게 전가했다. 그러나 그 지주들조차 빈곤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명나라엔 1100여개의 현이 있었고 그것이 명나라의 기본 징수 단위가 되었다. 부유한 현은 가난한 현의 몇백배의 세금을 할당받았다. 이러한 세금제도는 실제 현의 경제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반영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한 이유는 조정에서 각 지방의 경제사정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정한 세금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명나라 역사 내내 세금제도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고 미납된 세금을 강압적으로 걷는 것은 도덕적 원칙에 위배되었다. 당시 세금은 가장 가난한 농민을 기준으로 맞춘 셈이고 각 현이 경제상으로 얼마나 부유해졌건, 혹은 얼마나 더 비참해졌건 그것은 조정에서 파악하지 못한다 정하고 아예 포기를 해버렸다. 조정은 일반 농민들이 비참한 기아선상을 해매는 것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할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농민들이 파탄상태에서 벗어난다는 희망을 가지기보단 그저 그런 가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거대한 통치기구를 통해서 대륙을 통합할 수 없었다. 어른을 아이보다 위에 두고 남자를 여자보다 존귀하게 하며 배운 자를 못 배운 자보다 우월하게 두는 유교적 규범은 조정의 행정능력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행정조직에 의해 단일함을 보장받은게 아니라 문화적, 규범적 연속성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제국을 통합하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유교적 규범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홍무연간, 황제는 대지주들과 부유한 자들을 처결하고 명나라를 중소지주들과 자영농의 천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농민을 거주지에서 멀리 나가지 못하게 했고 만약 나가고자 한다면 관청의 허가를 얻도록 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에서 적정한 세금을 걷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그러한 불평등을 제거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오래갈 수가 없었다. 오로지 농본주의 국가를 유지하기에는 이미 농업과 기술이 너무나도 발전해 있었다.

기술상의 발전은 사회상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잉여생산물이 유통되고 상업이 발달하며 때맞추어 금은이 신대륙, 유럽, 일본 등으로부터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명나라의 경제는 가속적으로 발전했다. 초기 홍무제를 제외한다면, 명나라의 정책은 사실 상공업을 통제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정에서 경제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선덕연간에는 황제가 신하들에게 은으로 하사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전하는 상업경제는 결코 자본주의로 이행될 수 없었다. 잉여생산물과 집중된 부는 재투자되어 새로운 부를 창출한 것이 아니라 무가치한 소비를 위해 사용되었다. 신사층과 관료들은 이처럼 농업이 몰락하고 상업이 발전함을 한탄하며 농민들이 토지에 붙어있지 않고 떠돌아다님을 개탄했지만, 한편으로 이 거대한 경제 속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자들이었다. 시장경제는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나 혹은 이에 준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경제를 조절하고 재산권을 보장하며 화폐와 신용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이 없다면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가능하지 않던 것이다.

명조정이 이러한 문제와 모순점들을 완전히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쪽에선 농민들이 굶어죽거나 비참한 기아선상을 해매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한 쪽에선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해 초호화판 생활을 벌이는 신사층과 상인들이 있었다. 조정은 계속해서 세제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가능하다면 이 거대한 상업경제를 조정의 통치와 결합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현재 있는 세금이라도 최대한 공정하게 거두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2세기에 걸쳐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그리고 만력제의 시대에 들어 세재 개혁들이 일조편법이라는 제도로 종합되게 된다.

로마의 제국화

사회과학
이전에 다른 곳에 투고했던 글을 다듬어 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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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초기엔 왕정으로 시작했다고 추측되나, 7대 왕 타르퀸을 쫒아낸 뒤엔 공화국이 된다. 이 공화국은 분명 전제정은 아니지만 민주정이라 보기엔 다소 독특한 면을 보인다. 공화국의 주권자는 분명히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 : 로마 원로원과 시민)였지만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그 실제적인 운영방식이나, 포함된 정신이 아테네의 그것과는 굉장히 다른 모양을 보인다.

아테네의 경우엔 누구도 참주가 되지 않도록 제어하기 위해서 주요 공무직은 모두 추첨과 같은 제도로 뽑았으며, 또한 거의 유일한 선출직인 10명의 장군들도 계속해서 민회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페리클레스조차 그의 정적들에 의해서 그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민회로 하여금 하도록 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체제는 아테네의 민주제가 어떤 면에선 지독한 통제주의적인 면을 지녔다는것을 말해준다. 아테네는 경쟁을 제한했고, 뛰어난 자들이 등장하여 권력을 잡는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실제로 도편추방제 등으로 추방된 인물들은 거의 아무런 죄도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인것 자체가 이유인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분명 아테네의 민주정을 유지시켜주는데엔 좋은 효과를 내었지만 아테네의 힘을 갉아먹는데에도 뛰어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결국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패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다시 제국을 재건하는 등 나름 중흥은 했지만 어찌되었건 옛 황금시대를 되찾을 수 없었다.

한편 로마는 어떠한가? 로마도 분명 독재자의 출현을 굉장히 경계했다. 로마 공화정엔 비상시를 대비한 독재관(Dictator)이라는 직위가 존재하였고, 집정관 한명의 지목을 통해서 임명될 수 있었지만(그리고 반년의 임기 동안엔 누구도 그 명령에 거역할 수 없었지만), 로마는 정말 중요한 때가 아니면 결코 독재관을 뽑지 않았고, 뽑은 뒤에도 상당한 경계를 보였다. 하지만 로마는 아테네와는 분명 다른 면이 있었다. 로마는 경쟁을 지나치게 제한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이라면 명예를 위하여 공적을 보이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개선식은 로마인이 누릴 수 있던 최고의 영광이었고 개선식이 벌어지는 동안 그 주인공은 신과 동급이 될 수도 있었다(물론 그의 옆에선 '너도 언젠가 죽을 인간임을 기억하라'는 경구를 읊는 노예가 있었지만).

이러한 로마인의 의식은 이후 로마가 패권을 잡는데에도 기여했다. 로마의 지배계급은 그 자신의 의무를 지나치리만큼 충실히 수행했고, 로마의 평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하는것을 결코 용납하지도 않았고,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했다(로마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굴욕은 기록말살형이었다). 이처럼 공화국의 체제는 단순히 공화를 보존하기 위한 통제 위주의 정책이 아니었다. 통제는 존재했으나 공화국은 항상 그 이상의 유연성을 위기 때마다 보여주었다. 로마인들은 일의 균형을 잘 알았고 그에 맞추어서 공화국을 운영했다.

이와같은 공화정의 체제는 삼니움 전쟁에서, 그리고 피로스 전쟁에서 그 능력을 보여주었다. 원로원은 뛰어난 결단력과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고, 그 힘으로 포에니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포에니 전쟁은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결정하는 대전으로써, 로마 공화정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명장중 하나라 평가받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로마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전선에 나간 집정관의 수도 50명이 넘으며 그중 10명 이상이 전사했다. 칸나에 회전에서만도 출전한 원로원 의원 50여명의 대다수가 사망했다. 하지만 로마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자마 회전에서 한니발을 패배시켰으며, 결국 3차 포에니 전쟁때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로마 공화국은 절정의 시대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공화정이 최고조에 오른 그때, 몰락의 기미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로마는 세계의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로마는 지중해 각지에 그 속주를 늘려갔으며, 각지의 속주에선 엄청난 부가 쏟아지고 있었고 이 부는 로마의 최상층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효율적인 라티푼디움에서 쏟아지는 농작물은 이와 대조적으로 중산층을 몰락시켰고, 이에 로마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을 보였다. 부유층 지역엔 수도관을 지나온 물이 흘렀지만 빈민가엔 쓰레기와 분뇨가 넘쳐났고 죽어나간 빈민들은 쓰레기에 그대로 같이 파묻혀서 처리되었다. 이것은 그리스에서도, 로마에서도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던 상황이었다. 노예로 전락하지 않는 이상 시민이 그렇게까지 몰락하는 사건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포에니 이후의 로마에서만 나타나는 괴상한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로마의 무한 레이스에서 실패한 자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로마의 냉혹한 경쟁 체제는 탈락자를 결코 보듬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다시 로마를 포에니 전쟁 이전으로 돌리려 한 것이 그라쿠스 형제이다. 그들은 지나치게 양극화된 사회를 어떻게 해서든 통제해보려 했다. 중산층을 키우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이 제출되었다. 이것은 지나치게 극소수 상층부에 집중된 부를 최대한 아래로 내려보내려는 행동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가 그 상층부에 속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러한 법안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사실상 원로원과의 정치투쟁을 벌여야 했고, 법안을 가결시키기 위해서 민회를 장악하여 원로원에 대항하도록 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모두가 아는 바일 것이다. 로마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사실 하층민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지닌것은 귀족 계급도 마찬가지였다. 리키니우스 법 이후 평민에게도 주요 요직에 진출할 기회가 열렸으며, 로마에선 부모의 업적이 자식에게 계승되지도 않았다. 출생의 특권이 아예 없던건 아니지만, 평민도 그 출중한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얻으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귀족도 몇대 동안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 완전히 잊혀질 수 있었다. 마리우스와 키케로는 평민 계급으로써 각각 군무와 변설로 원로원에 들어갔다. 공화정 초기부터의 뿌리깊던 귀족가문인 율리우스 씨족은 수부라에서 살아야 했다.

로마에서 출세하고자 한다면 명예와 권위를 얻어야 했다. 명예는 언제나 존중되었으며, 뛰어난 공적을 세운 자는 그에 마땅한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로마를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패권국으로 이끄는 힘이었으나, 그 힘은 필연적으로 내부에 제정으로 향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포에니 전쟁 전까지는 극단적으로 계층이 양극화되지도 않았고, 중산층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무장하였기에 장군이 그들을 사병화시킬 위험도 낮았다. 로마 군단은 분명 질서가 있었고 그 충성의 대상은 SPQR이었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중산층은 몰락했고, 양극화의 결과 로마에선 군인의 대상층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수가 얼마되지 않는 최상층만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무장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이런 경쟁에서 낙후하지 않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어렸을때부터 가혹한 교육을 받았다(여유있는 집안일수록 더더욱!). 아이들은 공화국의 미덕에 따른 강인한 육체를 위해서 어렸을때부터 신체를 단련했으며(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법이나 수사학, 그리스 철학 등을 교육받았다. 로마의 가부장적인 시스템도 이러한 경향을 과열시켰다. 아버지는 때에 따라선 가족의 생사여탈권도 쥐고 있었고,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항명하는 사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가혹한 시스템 덕분에 영아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남는 비율은 절반도 되지 못했다(뭐 사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도 있지만 워낙 그 당시의 위생 수준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런 경쟁 시스템의 결과로써 로마는 그야말로 거인이라 칭할만한 사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평민으로써 입지적인 군사 공적을 세운 마리우스, 그리고 그 부관이었지만 마리우스를 뛰어넘은 독재자이자 자칭 행운아(Phelix)이던 술라, 술라의 지지자이자 그 시대를 이끌던 변설가 호르텐시우스, 그를 꺾은 고대 수사학의 완성자 키케로, 로마 최대의 부자였으며 또한 배후의 음모가였던 크라수스, 로마 최고의 장군중 하나였던 폼페이우스,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또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카이사르, 그에 필적하는 가면의 정치가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립파, 이에 대항한 안토니우스 등의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화라는 이념에는 위협이 되었다.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체제이다. 그리고 집정관과 원로원, 속주 총독, 군대의 사령관은 모두 이 공화국이라는 위대한 체제의 부품일 뿐이다. 분명 로마는 지나치게 강력한 자를 견제할망정, 그러한 사람이 받는 명예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화국의 일부로서만 인정되어야 했다. 영웅은 좋은 것이나, 영웅으로서 유지되지 않는 것이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의 어느 순간, 로마인들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체제가 핵심적인 몇명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극단적인 경쟁은 극단적인 양극화를 불러왔다. 극단적인 양극화라는 것은 승리자와 패배자가 극단적으로 나뉜다는 뜻이다. 승리자들은 언제라도 그들이 추락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최상층의 계급들도 계속해서 자신들끼리 경쟁하기 시작했다. 경쟁이 과열될수록 패배자의 운명도 가혹해졌으니, 이러한 경쟁에서의 승리는 원로원에서의 변설로만 될 것이 아니었다. 군대끼리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군대를 장군의 사병으로 만들었으며, 내전으로 향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후 이어지는 내전은 기존의 모든 권위(성역이던 로마, 원로원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술라의 로마 시(市) 점령은 이후 100년간 시작될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내전이 시작되면 경쟁자는 내전의 참가자로 압축된다. 내전은 모든 경쟁자가 합의하거나, 혹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친 단일한 승리자가 등장할때까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도 언제든지 다시 한번 내전이 시작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공화국의 극단적 경쟁시스템은 궁극적으론 오로지 한명의 승리자를 탄생시키게 될 것이었다. 이제 그 승리자가 내전의 종식을 선언했을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겠는가?

첫번째 내전의 승리자인 술라는 스스로가 공화정의 지지자였기도 했고, 공화국을 무너뜨릴 야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 후계자들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술라의 다음 세대의 승리자,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취임함으로써 왕(Rex)으로써의 길을 열어젖혔다. 카이사르가 동방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전제적인 체제를 도입하려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는 암살로 저지되었지만 공화정의 붕괴는 이미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로마의 공화정, 그 자체의 역동적인 힘이 가르키는 방향은 분명했다. 3번째 내전이 종결되었을때, 오로지 단일한 승리자, 위대한 옥타비아누스는 B.C.E 27년, 존엄한 자(Augustus)의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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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긴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았다. 때문에 어째서 내전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뛰어난 판단을 가졌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통해 권위를 획득하고, 개선식을 황제에게만 허용함으로서(황제가 아니면 아무리 잘난 공적을 세웠어도 약식 개선식에만 만족해야 했다) 군인 영웅이 나타나는 것을 견제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데에 혈족을 중시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 어느 정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신격(Divus) 카이사르의 아들로써 스스로 신의 아들이었고, 그 신성성이 피로써 승계된다면 제국의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후 이어지는 네로까지의 황조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라 한다.

로마의 군사 전략도 바뀌었다. 공화정 시기에는 정복이 일상화된 일이었고 장군들은 자신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혹은 부하들의 약탈과 정착을 위하여 계속하여 정복지를 늘여나가야 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를 제거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해적을 토벌했고, 크라수스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정벌에 나섰다. 이러한 전략은 아우구스투스때에 전면적으로 바뀌어 이전의 공격 주의보다는 방어 위주의 전략이 되었다. 라인 강에서부터 도나우 강 하구까지가 제국의 북쪽 국경선으로 바뀌었고, 로마의 군단 기지들은 이 선을 따라 늘어섰다. 비록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에 게르만 공략이 한번 시행되긴 했지만 다음 대의 티베리우스 황제때 로마군은 철수하고 이후 브리튼 섬의 점령 등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영토는 큰 변동 없이 진행되었으며, 공적을 쌓을 기회도 줄어들었다.

제정이 성립된 이후, 경쟁은 부분적으로 제한되었다. 군권은 어찌되었건 황제가 지녔고 이것은 황제의 칭호중 하나인 임페라토르(Imperator)를 통해 증명되었다. 새 황제가 즉위하면 로마의 군단들은 모두 황제를 향해 충성 서약을 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은 공화정에 비해선 뛰어난 인재의 배출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주권자가 아무리 SPQR이라지만 원로원은 황제보다 비중이 낮아졌고, 그저 평화와 안락에 젖게된다. 경쟁의 제한은 초기엔 제한적이었지만 갈수록 심각해졌다. 로마 공화정의 붕괴가 포에니 전쟁의 승리와 패권에서 예상되었듯이 제국의 붕괴는 제정의 전성기이던 피우스 황제때에 예견되었다. 피우스 황제는 5현제의 4번째 황제로써 그의 시대는 정말 무난하고 제국이 잘 돌아가던 시대다. 그는 20년의 치세동안 수도 로마에서 벗어난 일이 거의 없었지만 제국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부에 내포한 위험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홍무제의 문관숙청

중국中國/명明
Prologue

명(明) 홍무(洪武) 12년, 좌승상(左丞相) 호유용(胡惟庸)은 사소한 몇가지 실수(형사사건과 행정과실)로 인해 추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발이라도 맞춘 듯 누군가 나타나서 호유용이 모반했다고 고변했다. 이것이 이른바 '호유용 사건'으로, 조정의 가장 큰 권신이자 중서성(中書省)의 수장이던 호유용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십년간 홍무황제(洪武皇帝)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며 수만 이상이 이에 연루되어 죽어나갈 것이었다.

왕조가 바뀔 때 마다, 혹은 군왕이 바뀔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중국 역사에선 상당히 흔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단연 돋보인다. 호유용 사건과 남옥(藍玉) 사건에 연루되어 개국 공신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태조의 손에 살육되었다. 그리고 그 외의 기간에도 결코 적다할 수 없는 관료들이 탐관오리라 하여 죽어나갔다. 황제의 손에 죽은 자는 적어도 수만, 많이 추산하는 사람은 10만이 넘을거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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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성립된 이래, 봉건시대(封建時代)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천명을 받아 만백성을 통치했다. 황제는 스스로 짐(朕)이라 칭하여 영토와 공간을 지배함을 선언하고 연호(年號)를 정하여 시간조차 의지하에 두었다. 황제의 명령은 칙명(勅命)이라 하여 이를 받는 자는 황제를 대하듯 무릎을 꿇고 천자의 의지를 받들어야 했다. 이처럼 황제는 만인지상의 지고한 위치를 쥐고 절대권력으로 인민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상의 이야기였다. 황제가 아무리 위대해도 현실에는 벽이 있었다. 하늘의 아들이라던 황제들은 종종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제위를 박탈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거대한 중화대륙과 인민들은 통치자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역대 황제들의 고심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발전이라면 역시 송대(宋代)의 문치주의 확립일 것이다. 당대(唐代)까지만 해도 지방에 일일이 관료를 파견하여 다스리는게 어려웠기 때문에 중앙에서 먼 지역에는 현지의 행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는 절도사를 임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방식은 효율적으로 거대한 영토를 통치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중앙 정부에서 다스리는 방식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 절도사들은 얼마 안가 군벌로서 성립하여 중앙정부를 무시할 수준으로 강력해졌으며 결국 이후 당나라는 쇠락의 길로 향했다. 다시 전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왕조를 수립한 송태조 조광윤은 그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절도사들의 군권을 회수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문관집단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른바 사대부로 대표되는 이들 문관집단은 황제의 손발이 되어 중앙에서 지방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 문관들도 항상 황제를 따른 것은 아니다. 군벌시대의 절도사들이 호족의 지지를 받아 군대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다면 이들 관료집단에게는 학문이 곧 무기였다. 이들은 붕당을 형성해 상대를 몰아세웠으며 송대 수백년의 역사 동안 당파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잘 알려졌듯이 주원장은 빈농출신이다. 때문에 당시 농민의 상황을 잘 알았다. 농민은 작은 땅을 일구며 평생 부지런히 일해도 굶주림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관리들은 수탈과 직위보존에만 급급하였고 지주나 유력자들과 얽혀 농민을 착취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주원장은 이들 신사층과 관료들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을 수 밖에 없었다. 일찍이 홍건적은 봉건황조의 개국이 아니라, 명왕출세와 미륵강생을 기반으로 하는 명교-미륵교 의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봉건왕조를 세워 황제가 되자 주원장은 깨달았다. 관료와 지역의 신사층은 제국 통치의 필수요소임을. 봉건제국의 황제는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았으며 제국을 통치하려면 반드시 호족들과 지방유력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를 걷고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게나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세가 너무 적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다. 조세가 불균형하면 국가는 내부로부터 붕괴된다. 때문에 건국자들과 그 후손들이 국체(國體)를 정비할 때는 반드시 조세제도가 포함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세를 균형있게 걷을 수 있는가?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이가 지닌 부(富)와 생산하는(혹은 미래에 생산할)재화(財貨)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양을 걷으면 그것만으로도 균형있게 세금이 분배되므로 호구조사만 제대로 되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에 착안되어 만들어진 것이 중국 북위(北魏) 이래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약 300년간 시행된 균전제(均田制)이다. 한(漢)이 멸망한 이후 농민들이 땅을 잃고 자영농들이 급속히 몰락하는 동안 호족들이 그 땅을 얻어 대토지를 보유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호족들이 대토지는 지니면 농민이 살 땅이 없어진다. 그러면 국가로서는 세금을 걷을 대상과 병역을 지울 대상을 잃게 된다. 또한 호족이 지역의 실권을 잡으면 군주권은 위험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균전제를 통하여 역대 황조들은 최대한 영토를 재분배하려고 노력했다(실효는 의문스럽지만).

원말 농민봉기는 상당수의 몽한 대지주들을 몰락시켰다. 특히나 중원지역과 화북지역은 전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지주계급이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강남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대명의 근거지였던 회서에는 오히려 수많은 신흥 지주가 생겼으며 이들이 초기 대명황조의 지배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은 홍무제에게 껄끄러운 일이었다. 이 빈농출신의 건국황제는 원말명초의 전쟁을 거치면서 회서출신의 호족과 지주의 조력으로 제국을 세웠다. 건국 공신들의 대부분, 그리고 제국 통치 기구의 주요 요직을 이들 회서인들이 차지했다. 이제 황제는 불안해졌다 : 내가 살아있을 때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약한 황태자 주표(朱標)가 저들 회서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공신들이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전횡하는게 아닐까?

황태자가 1392년 4월에 38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먼저 사망하자 어린 황손(주윤문朱允? : 후일의 건문제建文帝)이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었다. 이 황손을 보며 노황제는 결심했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구오지존으로서 황제가 천하의 중심이 되길 바랬으며 누구도 황제에게 대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지녔다. 그러나 그 황제의 통치가 저들 봉건지주들에게 지탱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명나라는 회서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의 나라임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회서인들을 포함한 지주들을 몰락시킨다면 이제 제국을 무엇으로 통치할 것인가? 그것은 과거시험을 거쳐 전국으로부터 뽑힌 관료들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은 긴 공부가 필요한 일이며 그 준비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지주계급,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농은 되어야 했다. 이는 대명이 건립되었던 최초의 과거에서 합격자의 대부분을 (상대적으로 전란이 적어 대지주의 몰락도 없었던) 강남출신들이 차지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맞서 홍무제는 제국 토지의 재분배를 했다. 다만 그것은 옛 북조(北朝)가 썼던 방법보다 훨씬 가혹한 방법을 통해 단기간 내에 이루어졌다. 주원장이 바란 세상은 대지주를 몰살시키고 그 땅을 자영농과 소지주들에게 분배하여 농민의 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강남 지주들은 호유용 사건과 남옥 사건에 연루되어 대규모로 죽어나갔다. 주원장에 의해 재산을 모두 잃고 운남으로 쫒겨나갔다는 강남 최고 부자 심만삼(沈萬三 : 실제 심만삼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죽었다)의 이야기는 실제 당시 강남에 있었던 수많은 지주들이 당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사회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회서인이나 신사층으로부터의 조력이 없이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관이 신사층에서 충당되는 구조는 황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당시의 관료기구의 미비함은 관료들의 인원 충당 뿐 아니라 실제 행정의 집행에서도 신사층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대부분의 문관들은 이에 딱히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명 조정의 행정적 능력과 제도로는 이들 관료들을 충분히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으며, 관료만으로 국가적 정책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

이들 문관 집단은 이중성을 지녔다. 그들은 유학을 배웠으며 어렸을 때부터 이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들의 도덕적 원칙에 충실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이익을 찾아 상인들이 곳곳으로 움직이는걸 한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자기모순으로 상업과 경제의 발전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도 그들 문관이며 신사층이었다. 명대 중기를 넘어서면 이미 대부분의 관료들은 번영하는 상업사회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기도 전에 그가 바랬던 세상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남자는 농사를 하고 여자는 집에서 길쌈하는 시대'는 이미 당시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명나라의 역사는 경제의 놀라울 만한 변화와 이를 어떻게든 쫒아가려 했던 조정의 노력이기도 하다. 흔히 홍무제의 강력한 농본정책으로 인해 명나라가 상공업을 억제하려 했다는 이미지가 정착되어있으나 실제 명나라 조정이 상업의 발전을 엄밀하게 금지하려 했던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명나라는 상업의 발전을 최대한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과 거대한 관료조직이 따라가기엔 대륙의 변화는 너무 빨랐다.

홍무제 사후, 명나라의 황제들은 결국 신사층과 타협하여 그들이 제국의 통치 요소임을 인정했다. 이후 농민의 천국은 사라졌고 잉여생산물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한다. 신사층과 이에 영합한 문관들은 비효율적인 국가제도의 틈과 허술한 행정망을 피해 막대한 재부를 쌓았고 명 조정은 결코 이것을 통제하에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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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명나라가 세워진지 2세기가 흘렀다. 정덕(正德), 가정(嘉靖) 연간을 거치며 명조의 재정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은 토지대장에서 빠지는 전토가 늘어나고 자영농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주요 문제로 지적했다. 부호들이 은닉한 토지를 찾기 위해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 측량을 시작했고 이로서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시행될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사층과 부호, 지주들의 반발은 강력했다. 장거정은 사후 관료들에 의해 탄핵당했고 그의 개혁은 후퇴했다. 만력 12년에 장거정의 죄상이 공표되었다. 이후 내각대학사에 임명된 신시행(申時行)은 문관집단의 수복에 들어갔다.

문관들은 이제야 황제를 그들이 원한 도덕율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관들의 도덕은 행정과 기술, 원칙만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제국을 유지해주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문관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신시행은 만력제를 설득하여 장거정이 시행했던 효율성 위주의 행정방식을 폐기하고 전례없이 3대 중요부서인 이부, 도찰원, 한림원의 관리를 유임시키는데에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황제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당시 내각대학사 신시행이 문관의 편을 들며 황제를 제약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황제와 문관 집단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했으며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는데에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벌어지고만 있었다. 황태자 책봉 문제에서 보여진 문관과 황제의 의견충돌은 이후 명나라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처럼 문관집단의 반발에도 부룩하고 만력제는 그의 선조였던 홍무제처럼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할 수도 없었으며 영락제(永樂帝)처럼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치제(弘治帝)처럼 문관들과 조화하는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서 소심하게 자랐으며 항상 제국의 후계자로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만력제는 죽을 때 까지 그의 정신에 가해진 금제를 헤어나지 못했다. 황태자의 책봉문제에서 황제가 보인 태도는 졸렬하기까지 했다.

만력 15(1587)년, 신시행은 요동순무가 보낸 참정의 탄핵안을 처리 해야 했다. 요동순무는 건주위(建州衛)의 추장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주변 부족을 통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우환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출병하고자 했으나 부하인 개원도참정(開原道參政)이 유화책을 주장하며 군대의 출동을 거절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정을 탄핵하는 순무의 상주가 북경에 도착하자 감찰관들은 오히려 참정의 사적 주장이 옳다하며 순무를 탄핵했다. 신시행은 여기서도 그 특유의 유화적인 방안을 내놓아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사소한 일로 문무의 불화를 야기하지 않는게 상책이라 판단한 신시행은 서로가 탄핵했으니 이 일은 더이상 거론치 않는것이 옳다고 황제에게 상주했다.

이전 몽골에 대한 처리에서도 그랬듯이 문관들은 무관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유화책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만약 신시행이 조금 더 이 일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는 당시 만주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건주위의 추장,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이름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간수의 법칙. Zimbardo, 1971

사회과학/심리학
이전에 깨진 유리창의 법칙에서도 지적했듯이 사람은 환경에 따라 태도와 행동이 바뀐다. 짐바르도는 이에 더 나아가서 보다 다양한 환경을 만들고 이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이 바뀌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실험목적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도소는 참으로 비인간적인 환경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감옥은 왜 그렇게 험악한 환경인가? 범죄자가 가는 곳이라서 험악한 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가? 아니면 환경이 사람을 그처럼 험악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직접적인 환경은 사람의 행동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것인가?

실험방법

실험자들은 대학의 심리학 건물 지하에 가짜 감옥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복도에 10미터짜리 섹션을 구획하여 조립식 벽으로 감방을 만들었다. 실험실을 개조하여 가로 약 2미터, 세로 3미터의 조그마한 감방 세 개를 만들어 쇠창살을 달고 검은 색 칠을 한 문을 만들어 달았다. 또한 벽장을 처벌 독방으로 만들었다.

이 감옥에 들어갈 사람들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간수로서 책임지고 감옥의 질서를 지키는 자들이다. 다른 한 쪽은 죄수로서 간수들에 의해 구금되며 통제당하는 자들이다.

참여자들은 지역 신문의 광고(미국에선 심리실험의 참여자들을 이런 식으로 모집하는 일이 자주 있다)를 통해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지원자 75명 중 심리테스트를 통해 보다 정상적이고 건전하다 판단되는 21명을 선발했다.

이들 중 무작위로 뽑힌 절반이 간수가 되었다. 그들에겐 제복과 검은 안경이 배당되었다. 남은 절반은 죄수가 되었다. 짐바르도는 팔로 알토(샌프란시스코 실리콘 밸리의 부촌) 경찰서의 경찰관들에게 이들을 각자의 집에서 '체포'하여 수갑을 채우고 경찰서로 연행하게 했다. 그런 다음 엉터리 죄목을 씌우고 눈을 가린 채 심리학부 지하실에 있는 감방으로 데려왔다. 그 다음에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수인 번호가 앞귀로 적힌 죄수복을 입혔다. 이 죄수복은 구금되어 있는 동안 그들을 식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관찰자들은 이후 약 2주간 이 가상의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할 것이다.

실험결과

엄밀히 말해 이 실험은 제대로 끝마쳐지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험은 어디까지나 실험으로 끝나야 하며 실험실 바깥으로 나가면 바로 이전과의 연계가 끊어져야 했다. 특히나 실험자들은 결코 심리 실험에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그들은 방관자로서 실험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험은 어느 순간 실험실을 벗어났다.

간수들 중 일부는 이전에 자신을 평화주의자로 자처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단시간에 혹독한 감독관의 역할에 빠져들었다.

첫날 밤 그들은 새벽 2시에 죄수들을 깨워서 팔굽혀펴기를 시키고 벽에 일렬로 정렬시킨 다음 다른 과업을 수행시켰다. 이튿날 아침 죄수들이 자신들의 번호를 찢어내고 감방 안에 바리케이트를 치며 반발하자, 간수들은 그들을 발가벗겨 소방전을 뿌렸으며 반란의 지도자를 독방에 처넣었다.

"우리는 종종 권력을 남용했죠. 예를 들면 그들의 면전에서 고함을 질렀거든요."

간수 중 한 사람이 회상했다.

"그건 완전히 공포 분위기였어요."

실험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간수들은 조직적으로 점점 더 잔인하고 가학적이 되었다.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은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변화의 강도와 속도였습니다."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도록 시키고 수갑을 채우고 머리에 종이 봉투를 뒤집어씌운 채 복도를 행진하도록 시켰다.

또 다른 간수는 회상했다.

"지금의 내 행동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어요. 난 적극적으로 잔인한 것들을 고안해냈던 것 같습니다."

서른여섯 시간이 지나고 난 뒤 한 죄수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 곧 석방시켜야만 했다. 그 뒤 '극도의 정서적인 우울증 증세인 울음과 분노와 격렬한 불안' 등으로 4명 이상이 석방되었다(이들은 실험참여비도 받지 않고 떠났다).

짐바르도는 원래 이 실험을 2주간 계속하려고 의도했었다. 그러나 그는 엿새 만에 실험을 중단했다.

실험이 끝나고 난 뒤 한 죄수는 말했다.

"이제야 저는 '내 머릿속에 있는 게 나야'라고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죄수로서의 제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다른 죄수는 말했다.

"저는 그때까지 '이게 나야'라고 불렀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 감옥에 자원해서 나를 집어넣은 사람(왜냐하면 그것이 감옥이었고 아직까지도 내개는 감옥이니까요. 난 그게 실험이라고나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은 나와는 전혀 별개였으며, 마침내 내가 그 사람이 전혀 아닐 때까지 나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나는 그저 416번 이었어요. 내가 바로 그 숫자였고, 사실상 416번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있더군요."

갈수록 교도소 내의 상황이 격해지자 실험자들은 수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논했다. 이 때 문을 열고 들어온 다른 실험자가 말했다.

'자네들 뭐하는거야? 이게 무슨 실험이지? 목적이 바뀌었나?'

그 순간 실험실 내의 실험자들은 깨달았다.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해야 할 자신들조차도 본래 실험의 목적을 잊고 가혹한 조치들을 당연시 여기고 있던 것이다. 짐바르도는 우리의 내적 기질은 특정한 상황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짐바르도가 말하는 상황이란 우리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다.

다시 말해 부모가 우리를 키운 것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가 다닌 학교가 어떤 종류의 학교인지, 우리 친구들이 어떤 사람인지, 또는 우리 이웃이 우리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같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의 요점은 훌륭한 학교와 행복한 가정과 좋은 이웃 출신인 정상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단지 그들이 처한 상황의 세부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약간만 변화시키는 것으로도 그들의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 Zimbardo, 1969

사회과학/심리학
사람들은 스스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끼치거나 이를 바꾸기도 하지만 반대로 환경에 맞추어 유연성있게 대처하기도 한다. 특히 밀그램의 실험은 권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명히 보여준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후속실험에서도 밝혀졌듯이, 권위있는 연구자를 두명으로 늘이고 둘 사이에 논쟁을 일으키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참여자는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을 중지했다. 이처럼 권위와 명령이 없을때 상당수의 사람은 직접 올바른 판단에 따라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실 권위와 명령의 중요도가 높은 군대 등의 조직에 족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들의 사회생활에서 명령으로 인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긴 하다 )

일반적인 경우 국가와 학교, 그리고 가정은 아이들이 태어날때부터 시작해서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다. 전쟁 등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당연히 살인은 처벌받고 그 외 타인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은 금지되거나 최소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며 왜 악행에 빠지는가?

지금부터 여러분이 볼 실험은 이와 관련이 있다. 감옥환경의 실험과 저서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로도 유명한 스탠포드 대학의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교수는 특정한 상황 하에서는 명령과 권위가 없이도 '자발적으로 비윤리적 행위를 자행할 수 있음'을 테스트할 것이다.

이론적 가설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금지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해당 재화를 소유한 자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소유권이 불명확하거나 방치되었다면 당연하게도 해당 재화를 손에 넣거나 최소한 보호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따라서 만약 길에 놓여진 차에 방치되었다고 판단할 만한 정보를 흘린다면 사람들은 이에 대한 침해를 시작할 것이다.

실험방법

짐바르도는 다소 치안이 허술한 골목에 보닛을 열은 두 대의 자동차를 두었다. 요소는 모두 통제되었으며 양쪽 차의 보존 상태는 동일했다. 그리고 이제 한쪽 차의 창문을 살짝 깨서 변수에 변화를 주었다. 실험자들은 앞으로 1주일간 양쪽 차에 일어날 변화를 관찰할 것이다.

실험결과

창문을 그대로 두고 보닛만 열어둔 자동차는 1주일 뒤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창문이 깨진 자동차에는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다. 불과 10분만에 배터리가 없어졌으며 타이어가 사라졌다. 이후 낙서, 투기, 파괴가 연이어 벌어졌으며 실험이 종료된 1주일 후에는 고철이 되어 폐기처분 직전의 상태로 전락했다.

이것은 유리창이 깨진 것을 통해서 해당 자동차가 보다 허술한 관리 하에 놓여있다고 행인들이 추정하게 만들었다고 추측된다. 처음엔 보다 눈에 띄지 않는 손상이 가해졌으나 해당 차가 버려진 상태라는것을 확인시키는 증거(낙서, 파괴흔적)가 늘어갈수록 차에 가해지는 행위도 더욱 심해졌다.

이를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의 법칙이라고 한다.

후속실험

네덜란드 그로닝겐 대학원생 케스 카이제르가 이끈 연구팀은 주간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최근호에 실린 논문을 통해 주위 환경이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 깨진 유리창 이론을 뒷받침했다.

연구팀은 6가지 상황을 놓고 주변 환경이 깨끗한 경우와 벽에 낙서가 된 지저분한 경우에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관찰했다.

첫번째로 쓰레기통이 설치되지 않은 좁은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자전거 손잡이에 부착된 광고전단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관찰할 결과, 골목길 벽이 단일 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공간에서는 광고전단이 길바닥에 버려진 비율이 33%였다.

반면, 골목길 벽에 낙서가 된 공간에서는 광고전단 10장 가운데 7장(69%)이 길바닥에 버려졌음을 연구팀은 확인했다. 골목길 벽에는 "낙서금지"라는 경고문구가 쓰여 있었으며 이러한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낙서가 된 곳에서는 보통 사람들도 준법의식이 약해졌음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또 주위가 말끔하게 정돈된 곳에 설치된 '깨끗한' 우체통과 쓰레기가 널브러진 곳에 설치된 '깨끗한' 우체통, 지저분한 환경 속의 '낙서투성이' 우체통을 각각 준비한 후, 이곳에 각각 5유로 지폐가 든 편지봉투를 걸쳐놓았다. 편지봉투는 수신자 주소가 적히는 부위의 투명비닐을 통해 봉투 안에 5유로 지폐가 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행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를 집어갈 수 있었다.

관찰 결과, 편지봉투를 집어간 비율이 깨끗한 주위 환경의 깨끗한 우체통의 경우는 13%였으나 지저분한 환경의 깨끗한 우체통에서는 25%로 높아졌고 지저분한 환경의 낙서투성이 우체통에서는 27%로 더 높아졌다. 연구팀은 6가지 상황 관찰에서 모두 유사한 패턴이 나타났다면서 깨진 유리창 이론은 현실적으로 타당성을 갖는다고 결론내렸다.

사회적용

라토가스 대학의 겔링 교수는 이 ‘깨진 유리창 이론’에 근거하여 뉴욕 시의 지하철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낙서를 철저하게 지우는 것을 제안했다. 낙서가 방치되어 있는 상태는 창문이 깨져있는 자동차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통국의 데빗 간 국장은 겔링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치안 회복을 목표로 지하철 치안 붕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낙서를 철저하게 청소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범죄를 줄이기 위해 낙서를 지운다는 놀랄만한 제안에 대해서 교통국의 직원들은 우선 범죄 단속부터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낙서가 범죄율의 상승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는 모양이다. 직원들은 범죄를 막기 위해선 단속을 강화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 국장은 낙서를 지우는 것을 철저하게 행하는 방침을 단행했고, 지하철의 차량 기지에 교통국의 직원이 투입되어 무려 6000대에 달하는 차량의 낙서를 지우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낙서가 얼마나 많았던 지, 지하철 낙서 지우기 프로젝트를 개시한 지 5년이나 지난, 1998년, 드디어 모든 낙서 지우기가 완료되었다. 낙서 지우기를 하고 나서 뉴욕시의 지하철 치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그때까지 계속해서 증가하던 지하철에서의 흉악 범죄 발생률이 낙서 지우기를 시행하고 나서부터 완만하게 되었고, 2년 후부터는 중 범죄 건수가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94년에는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뉴욕의 지하철 중 범죄 사건은 놀랍게도75%나 급감했던 것이다.

그 후, 1994년 뉴욕 시장에 취임한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은 지하철에서 성과를 올린 범죄 억제 대책을 뉴욕시 경찰에 도입했다. 낙서를 지우고, 보행자의 신호 무시나 빈 캔을 아무데나 버리기 등 경범죄의 단속을 철저하게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범죄 발생 건수가 급격히 감소했고, 마침내 범죄 도시의 오명을 불식시키는데 성공했다.

철학적 질문?

사회과학/철학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선생이 교실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무인도에서 나무가 쓰러졌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모르고 알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쓰러진걸 쓰러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학생들이 열심히 철학적인 토론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쓰러졌다'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定義 : definition)했는지가 곧 답이다. 요컨데 '그것을 인지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쓰러졌다'라는 기표(記標) 안에 정보로서 삽입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쓰러졌다'라는 단어는 상황의 모든 정보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두고 쓸모없는 토론이 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시에 이에 대해 미리 정의하면 의미없는 토론이 없을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필요로 할 일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심술굳은 선생이나 멍청한 철학자가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지만 않는다면 일상생활에서 인지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말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언어란건 정보의 전달이 목적이며 가급적 간결할수록 좋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의미를 무한히 확장해나가다간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하는 법을 키우자는것은 좋다. 그러나 생각을 해도 무작정 아무렇게나 한다고 해서 훈련이 되는게 아니다. 생각에도 절차가 있고 방법이 있다. 아무런 의미없이 토론하게 하는것으로 사고가 유연해질거라 보는것은 아무렇게나 운동하면 몸이 강해질거라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일이다.

최첨단 법제

사회과학
여기 어떤 망치가 있다고 하자. 이 망치는 머리와 자루가 모두 옥玉으로 되어있으며 뛰어난 장인이 긴 시간을 두어 조각했다. 그 결과 빛을 비추면 몸에서 광채가 나며 그 예술성으로 인해 보는 사람마다 찬탄을 아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망치로 못을 박으려 하면 오히려 망치가 손상되었으며 강하게 힘을 주면 망치가 부숴졌다. 때문에 이 망치로는 못을 박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망치는 과연 망치로서 제대로 됬다고 할 수 있을까?

李노동 "국내 비정규직 보호제도는 최첨단"(종합)

필자는 위 기사를 읽으면서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글은 현실을 무시하고 엉뚱한 것을 기준 삼아서 정책을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법이건 간에, 그 용도는 반드시 사회와 세속에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어느 지역 어느 시대의 법조문이라도 그 자체를 읽는것만으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혹은 시대를 뛰어넘는 최첨단인지 오히려 반동적인지는 알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법은 현실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현실을 모르고서는 법조문 자체를 읽는것만으로 그것이 악법인지를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시했던 망치는 예술품으로서는 훌륭할 지 모르나 공구로서는 그렇지 못했다. 법조문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만들어지고 이상적으로 계획되었건 간에, 현실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창조적인 예술가가 망치의 형상을 따서 예술품을 만들어도 그것은 그 예술가 개인에 속한다. 때문에 그것이 맘에 안든다면 새 망치를 하나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 국가에 법은 오로지 하나이다. 법은 오로지 법으로서 작용해야하지 사상적 유희로 사용할 수 없다. 법은 만드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법의 본래 목적(本)이다.

프로그래머들의 고전인 "프로그래밍 심리학"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있다.

                 *                  *                  *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향하던 프로그래머는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다시 의뢰 회사로 돌아왔다. 프로젝트 팀들과 진행자들 앞에서 그는 그 새로운 프로그래밍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기존 프로젝트 팀의 반응은 냉랭했다. 한 프로그래머가 물었다.

"당신의 프로그램은 얼마나 빠르게 일을 처리합니까?"
"10초에 한 장 정도일 것입니다."

물어본 프로그래머가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은 초당 한 장을 처리할 수 있다며 새 프로그램을 비웃자, 새 프로그램을 들고온 프로그래머가 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만든 프로그램은 작동하지 않잖아요. 작동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면 나는 초당 10장을 처리하는 프로그램도 만들 수 있어요."

원말 농민봉기의 배경

중국中國/명明
 잘 알려졌듯이 주원장은 빈농출신 황제이다. 그가 어렸을 때 관리들은 수탈과 직위보존에만 급급하였고 농민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주원장은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스스로는 고고한 척 하는 신사층과 관료들에 대해 깊은 원한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신사층을 기반으로 하는 봉건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당시 그가 거병할 수 있게 했던 홍건적(紅巾賊)의 배경에 대해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원 조정이 세력을 잃고 점점 쇠퇴해갈 무렵,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종교들이 있었다. 당시 하층사회에서는 크게 세가지의 종교를 믿었는데, 백련교白蓮敎와 미륵교彌勒敎, 그리고 명교明敎였다. 서계西系 홍군을 일으킨 팽형옥彭瑩玉은 미륵불彌勒佛과 명왕明王을 신으로 받들었다. 이들은 주로 회서에서 포교했기 때문에 남파南派라고도 한다. 이른바 북파北派라고 불린 또 다른 계통은 몇 대에 걸쳐 백련교의 교주를 맡아온 한가韓家의 한산동韓山童이다.

 본래 명교의 연원은 페르시아의 마니가 창시한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이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이종삼제二宗三際가 그것이다. 마니교는 세상을 명明(=선善)과 암暗(=악惡)의 두 세력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이종이다. 삼제는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시대다. 초제에선 천지도 없고 명과 암만 존재한다. 중제에서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자 명왕明王이 출세出世하여 암을 물리친다. 후제에 이르면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간다. 이 셋이 삼세로서, 초제는 과거를, 중제는 현재를, 그리고 후제는 미래를 의미한다. 명교는 당나라때 중국에 들어왔으며 구세적인 교리로 인해 하층민들이 주로 믿었다. 당 무종武宗때 사회 혼란을 우려하여 금지되자 이후 비밀종교화되어 여러 교리가 뒤섞이며 혼합된다.

 미륵교는 이름 그대로 미륵불(彌勒佛, Maitreya)을 중심으로 하는 교이다. 미륵은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로 본래 국왕이었다. 여래 생전에 옆에서 설법을 듣기도 하였으며,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이후 56억 7천만년이 되었을 때 도솔천에서 이 세상으로 하생(下生)한다고 한다. 미륵은 하생하기 전까지 도솔천(兜率天)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한다. 본래 불교의 성격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미륵이 현세하는 순간 모든 중생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세상살기가 어렵고 팍팍했던 하층민들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백련교는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ha)을 공양하는 종교이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이나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부처로 중생을 서방극락정토에 왕생시키는 공덕이 있으며 불법이 실현된 정토에서 지금도 늘 설법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의 속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종교는 신도들에게 선행을 쌓으면 사후 서방정토의 백련지白蓮池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쉽게(?) 구원을 약속하는 교리는 어려운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소리였다.

 이 세 종교는 시작은 달랐으나 모두 현세부정적이며 이 세계를 말세로 보았다는 특징 때문에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하층민들에게 빠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오대五代와 송대宋代를 거쳐 서로 혼합되어 구별이 어려워진다. 이들 종교는 원대元代에 이르면 조정이 무력해진 틈을 타 비밀결사를 구성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구세를 약속하며 수많은 농민들을 포섭하는데에 성공하였다.

 원말에 일어난 각지의 반란군들은 크건 적건 대부분 이 비밀결사들과 연관이 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북파 홍건적의 수장 한산동은 스스로 송 휘종(宋 徽宗)의 8세손이라 주장하며 명왕明이라 칭했다. 명왕 한산동은 지정 11년에 죽었지만 그 아들인 한림아(韓林兒)가 홍건의 장군 유복통(劉福通)에 의해 황제에 즉위하여 소명왕(小明王)이라 칭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지정 12년, 호주(濠州)에서 곽자흥(郭子興)이 거병한다. 주원장은 그 부하로 들어가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미래의 홍무황제(洪武皇帝)는 여기에서 군벌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많은 동북아인들에게 군웅할거의 시기로 가장 유명한 때는 누가 뭐라해도 소설 삼국지연의의 배경이 되는 후한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자들 중 신분이 빈천한 자는 상당히 드물다. 심지어 허저조차도 호족출신으로 유력자의 집안이었다. 원말 농민봉기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 호족들이 중심이 되어가지만 그럼에도 원 조정을 향해 최초의 칼날을 들이밀었던 홍건적은 후한말의 황건적과는 다르게 이후 수십여년간의 혼란기동안 천하의병의 명분이 되었다. 곽자흥은 물론이고 주원장조차도 명분상으로나마 소명왕을 의병의 수장으로 인정했었다.

 그렇지만 이들 종교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현세부정적인 종교나 사상들은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으며 만약 어떠한 이유로건 현 질서가 붕괴되고 있다면 반드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의 사상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현세가 부정됨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신질서에선 그 가치를 잃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세의 파괴에 기여할 수는 있었으나 구체제 이후 생겨날 신질서에서 배제되고 몰락할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조정이 약하되자 각지에서 할거가 시작되고 군웅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이나 그들의 지원을 받는 자)로서, 명교가 아니라 자신이 유력자로 있는 지역을 기반으로 거병한게 대부분이다. 비록 소명왕이 천하의병의 명목상 수장이었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반란군들의 비밀결사적 색체는 점점 옅어졌고 군웅들은 빈민들이 아닌 유력 호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병마와 군량을 모았다.

 지정 23년, 남쪽에서 오나라를 세운 장사성(張士誠)이 여진(呂珍)을 보내 유복통과 소명왕을 공격했다. 당시 금릉(후일의 남경)을 차지하고 세력을 키우던 주원장은 군대를 이끌고 한림아를 구출하여 저주(滁州)로 맞아들였으나, 불과 3년후 쓸모없어진 소명왕은 주원장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사고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십여년 뒤 각지의 군벌을 물리친 주원장은 남경에서 대명제국을 개창하여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홍무 3년, 칙명에 의해 명교와 미륵교, 백련교는 좌도左道로 규정되어 금지되었다.

자유와 질서

사회과학/철학
자유라는 말은 흔히 통제와 반대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요컨데 자유는 오로지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으며 통제로부터 벗어나야만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길거리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하려면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이를테면 행인을 습격하는 강도라던)가 제거되어야만 한다. 자유는 방치함에서 탄생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자유라는 말은 '누군가(혹은 무엇인가)'가 구속받지 않음을 의미하며, 여기서 그 누군가는 곧 주체(주관:主觀)이다. 정치사상이나 사회학에서 그 주체는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보면 자유는 인간의 본성(마음)대로 행동함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요컨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마음이 규정한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 곧 자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결코 무질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단어의 기의가 곧 엔트로피의 특정 방향으로의 역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작동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 유기체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이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설계도에 쓰여진 대로(질서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자유와 통제는 상충하는게 아니라 완벽한 동일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통제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통제나 절제가 방향이 잘못되어 필요하지 않은 곳에 적용되었거나 혹은 본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으나 결과가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맨 처음의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인을 습격하는 강도의 통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법자가 처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통제당한다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도 해를 당할 수 있고 자기가 남을 해입힐 수도 있는 사회보다는 자기도 당하지 않고 자기가 남을 당하게 할 수도 없는 사회를 더 선호한다(당연하게도 내전중인 국가나 무정부상태인 국가는 여행이나 이민에서 기피 대상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행자의 통행을 막거나 집에서 나서지 못하게 한다면 이 경우엔 대부분의 사람이 반발하며, 자신들의 당연한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느끼며 답답해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를테면 먹고 살 길)이 막힌다면 그저 답답해 하는 수준을 넘어서 국가와 사회를 적대하기까지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다. 결국 자유는 인간이 하려고 하는 것을 하게 해주는 것이며 그러지 않으려는 것을 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이 그저 '사회엔 질서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필요하지도 않고 비용만 들며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는 통제를 강요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회엔 질서와 통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질서와 어떠한 종류의 통제도 허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