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o

로마의 제국화

사회과학
이전에 다른 곳에 투고했던 글을 다듬어 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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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초기엔 왕정으로 시작했다고 추측되나, 7대 왕 타르퀸을 쫒아낸 뒤엔 공화국이 된다. 이 공화국은 분명 전제정은 아니지만 민주정이라 보기엔 다소 독특한 면을 보인다. 공화국의 주권자는 분명히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 : 로마 원로원과 시민)였지만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그 실제적인 운영방식이나, 포함된 정신이 아테네의 그것과는 굉장히 다른 모양을 보인다.

아테네의 경우엔 누구도 참주가 되지 않도록 제어하기 위해서 주요 공무직은 모두 추첨과 같은 제도로 뽑았으며, 또한 거의 유일한 선출직인 10명의 장군들도 계속해서 민회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페리클레스조차 그의 정적들에 의해서 그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민회로 하여금 하도록 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체제는 아테네의 민주제가 어떤 면에선 지독한 통제주의적인 면을 지녔다는것을 말해준다. 아테네는 경쟁을 제한했고, 뛰어난 자들이 등장하여 권력을 잡는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실제로 도편추방제 등으로 추방된 인물들은 거의 아무런 죄도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인것 자체가 이유인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분명 아테네의 민주정을 유지시켜주는데엔 좋은 효과를 내었지만 아테네의 힘을 갉아먹는데에도 뛰어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결국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패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다시 제국을 재건하는 등 나름 중흥은 했지만 어찌되었건 옛 황금시대를 되찾을 수 없었다.

한편 로마는 어떠한가? 로마도 분명 독재자의 출현을 굉장히 경계했다. 로마 공화정엔 비상시를 대비한 독재관(Dictator)이라는 직위가 존재하였고, 집정관 한명의 지목을 통해서 임명될 수 있었지만(그리고 반년의 임기 동안엔 누구도 그 명령에 거역할 수 없었지만), 로마는 정말 중요한 때가 아니면 결코 독재관을 뽑지 않았고, 뽑은 뒤에도 상당한 경계를 보였다. 하지만 로마는 아테네와는 분명 다른 면이 있었다. 로마는 경쟁을 지나치게 제한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이라면 명예를 위하여 공적을 보이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개선식은 로마인이 누릴 수 있던 최고의 영광이었고 개선식이 벌어지는 동안 그 주인공은 신과 동급이 될 수도 있었다(물론 그의 옆에선 '너도 언젠가 죽을 인간임을 기억하라'는 경구를 읊는 노예가 있었지만).

이러한 로마인의 의식은 이후 로마가 패권을 잡는데에도 기여했다. 로마의 지배계급은 그 자신의 의무를 지나치리만큼 충실히 수행했고, 로마의 평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하는것을 결코 용납하지도 않았고,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했다(로마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굴욕은 기록말살형이었다). 이처럼 공화국의 체제는 단순히 공화를 보존하기 위한 통제 위주의 정책이 아니었다. 통제는 존재했으나 공화국은 항상 그 이상의 유연성을 위기 때마다 보여주었다. 로마인들은 일의 균형을 잘 알았고 그에 맞추어서 공화국을 운영했다.

이와같은 공화정의 체제는 삼니움 전쟁에서, 그리고 피로스 전쟁에서 그 능력을 보여주었다. 원로원은 뛰어난 결단력과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고, 그 힘으로 포에니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포에니 전쟁은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결정하는 대전으로써, 로마 공화정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명장중 하나라 평가받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로마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전선에 나간 집정관의 수도 50명이 넘으며 그중 10명 이상이 전사했다. 칸나에 회전에서만도 출전한 원로원 의원 50여명의 대다수가 사망했다. 하지만 로마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자마 회전에서 한니발을 패배시켰으며, 결국 3차 포에니 전쟁때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로마 공화국은 절정의 시대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공화정이 최고조에 오른 그때, 몰락의 기미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로마는 세계의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로마는 지중해 각지에 그 속주를 늘려갔으며, 각지의 속주에선 엄청난 부가 쏟아지고 있었고 이 부는 로마의 최상층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효율적인 라티푼디움에서 쏟아지는 농작물은 이와 대조적으로 중산층을 몰락시켰고, 이에 로마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을 보였다. 부유층 지역엔 수도관을 지나온 물이 흘렀지만 빈민가엔 쓰레기와 분뇨가 넘쳐났고 죽어나간 빈민들은 쓰레기에 그대로 같이 파묻혀서 처리되었다. 이것은 그리스에서도, 로마에서도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던 상황이었다. 노예로 전락하지 않는 이상 시민이 그렇게까지 몰락하는 사건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포에니 이후의 로마에서만 나타나는 괴상한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로마의 무한 레이스에서 실패한 자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로마의 냉혹한 경쟁 체제는 탈락자를 결코 보듬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다시 로마를 포에니 전쟁 이전으로 돌리려 한 것이 그라쿠스 형제이다. 그들은 지나치게 양극화된 사회를 어떻게 해서든 통제해보려 했다. 중산층을 키우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이 제출되었다. 이것은 지나치게 극소수 상층부에 집중된 부를 최대한 아래로 내려보내려는 행동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가 그 상층부에 속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러한 법안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사실상 원로원과의 정치투쟁을 벌여야 했고, 법안을 가결시키기 위해서 민회를 장악하여 원로원에 대항하도록 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모두가 아는 바일 것이다. 로마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사실 하층민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지닌것은 귀족 계급도 마찬가지였다. 리키니우스 법 이후 평민에게도 주요 요직에 진출할 기회가 열렸으며, 로마에선 부모의 업적이 자식에게 계승되지도 않았다. 출생의 특권이 아예 없던건 아니지만, 평민도 그 출중한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얻으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귀족도 몇대 동안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 완전히 잊혀질 수 있었다. 마리우스와 키케로는 평민 계급으로써 각각 군무와 변설로 원로원에 들어갔다. 공화정 초기부터의 뿌리깊던 귀족가문인 율리우스 씨족은 수부라에서 살아야 했다.

로마에서 출세하고자 한다면 명예와 권위를 얻어야 했다. 명예는 언제나 존중되었으며, 뛰어난 공적을 세운 자는 그에 마땅한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로마를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패권국으로 이끄는 힘이었으나, 그 힘은 필연적으로 내부에 제정으로 향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포에니 전쟁 전까지는 극단적으로 계층이 양극화되지도 않았고, 중산층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무장하였기에 장군이 그들을 사병화시킬 위험도 낮았다. 로마 군단은 분명 질서가 있었고 그 충성의 대상은 SPQR이었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중산층은 몰락했고, 양극화의 결과 로마에선 군인의 대상층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수가 얼마되지 않는 최상층만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무장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이런 경쟁에서 낙후하지 않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어렸을때부터 가혹한 교육을 받았다(여유있는 집안일수록 더더욱!). 아이들은 공화국의 미덕에 따른 강인한 육체를 위해서 어렸을때부터 신체를 단련했으며(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법이나 수사학, 그리스 철학 등을 교육받았다. 로마의 가부장적인 시스템도 이러한 경향을 과열시켰다. 아버지는 때에 따라선 가족의 생사여탈권도 쥐고 있었고,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항명하는 사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가혹한 시스템 덕분에 영아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남는 비율은 절반도 되지 못했다(뭐 사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도 있지만 워낙 그 당시의 위생 수준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런 경쟁 시스템의 결과로써 로마는 그야말로 거인이라 칭할만한 사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평민으로써 입지적인 군사 공적을 세운 마리우스, 그리고 그 부관이었지만 마리우스를 뛰어넘은 독재자이자 자칭 행운아(Phelix)이던 술라, 술라의 지지자이자 그 시대를 이끌던 변설가 호르텐시우스, 그를 꺾은 고대 수사학의 완성자 키케로, 로마 최대의 부자였으며 또한 배후의 음모가였던 크라수스, 로마 최고의 장군중 하나였던 폼페이우스,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또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카이사르, 그에 필적하는 가면의 정치가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립파, 이에 대항한 안토니우스 등의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화라는 이념에는 위협이 되었다.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체제이다. 그리고 집정관과 원로원, 속주 총독, 군대의 사령관은 모두 이 공화국이라는 위대한 체제의 부품일 뿐이다. 분명 로마는 지나치게 강력한 자를 견제할망정, 그러한 사람이 받는 명예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화국의 일부로서만 인정되어야 했다. 영웅은 좋은 것이나, 영웅으로서 유지되지 않는 것이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의 어느 순간, 로마인들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체제가 핵심적인 몇명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극단적인 경쟁은 극단적인 양극화를 불러왔다. 극단적인 양극화라는 것은 승리자와 패배자가 극단적으로 나뉜다는 뜻이다. 승리자들은 언제라도 그들이 추락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최상층의 계급들도 계속해서 자신들끼리 경쟁하기 시작했다. 경쟁이 과열될수록 패배자의 운명도 가혹해졌으니, 이러한 경쟁에서의 승리는 원로원에서의 변설로만 될 것이 아니었다. 군대끼리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군대를 장군의 사병으로 만들었으며, 내전으로 향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후 이어지는 내전은 기존의 모든 권위(성역이던 로마, 원로원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술라의 로마 시(市) 점령은 이후 100년간 시작될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내전이 시작되면 경쟁자는 내전의 참가자로 압축된다. 내전은 모든 경쟁자가 합의하거나, 혹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친 단일한 승리자가 등장할때까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도 언제든지 다시 한번 내전이 시작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공화국의 극단적 경쟁시스템은 궁극적으론 오로지 한명의 승리자를 탄생시키게 될 것이었다. 이제 그 승리자가 내전의 종식을 선언했을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겠는가?

첫번째 내전의 승리자인 술라는 스스로가 공화정의 지지자였기도 했고, 공화국을 무너뜨릴 야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 후계자들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술라의 다음 세대의 승리자,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취임함으로써 왕(Rex)으로써의 길을 열어젖혔다. 카이사르가 동방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전제적인 체제를 도입하려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는 암살로 저지되었지만 공화정의 붕괴는 이미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로마의 공화정, 그 자체의 역동적인 힘이 가르키는 방향은 분명했다. 3번째 내전이 종결되었을때, 오로지 단일한 승리자, 위대한 옥타비아누스는 B.C.E 27년, 존엄한 자(Augustus)의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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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긴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았다. 때문에 어째서 내전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뛰어난 판단을 가졌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통해 권위를 획득하고, 개선식을 황제에게만 허용함으로서(황제가 아니면 아무리 잘난 공적을 세웠어도 약식 개선식에만 만족해야 했다) 군인 영웅이 나타나는 것을 견제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데에 혈족을 중시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 어느 정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신격(Divus) 카이사르의 아들로써 스스로 신의 아들이었고, 그 신성성이 피로써 승계된다면 제국의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후 이어지는 네로까지의 황조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라 한다.

로마의 군사 전략도 바뀌었다. 공화정 시기에는 정복이 일상화된 일이었고 장군들은 자신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혹은 부하들의 약탈과 정착을 위하여 계속하여 정복지를 늘여나가야 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를 제거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해적을 토벌했고, 크라수스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정벌에 나섰다. 이러한 전략은 아우구스투스때에 전면적으로 바뀌어 이전의 공격 주의보다는 방어 위주의 전략이 되었다. 라인 강에서부터 도나우 강 하구까지가 제국의 북쪽 국경선으로 바뀌었고, 로마의 군단 기지들은 이 선을 따라 늘어섰다. 비록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에 게르만 공략이 한번 시행되긴 했지만 다음 대의 티베리우스 황제때 로마군은 철수하고 이후 브리튼 섬의 점령 등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영토는 큰 변동 없이 진행되었으며, 공적을 쌓을 기회도 줄어들었다.

제정이 성립된 이후, 경쟁은 부분적으로 제한되었다. 군권은 어찌되었건 황제가 지녔고 이것은 황제의 칭호중 하나인 임페라토르(Imperator)를 통해 증명되었다. 새 황제가 즉위하면 로마의 군단들은 모두 황제를 향해 충성 서약을 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은 공화정에 비해선 뛰어난 인재의 배출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주권자가 아무리 SPQR이라지만 원로원은 황제보다 비중이 낮아졌고, 그저 평화와 안락에 젖게된다. 경쟁의 제한은 초기엔 제한적이었지만 갈수록 심각해졌다. 로마 공화정의 붕괴가 포에니 전쟁의 승리와 패권에서 예상되었듯이 제국의 붕괴는 제정의 전성기이던 피우스 황제때에 예견되었다. 피우스 황제는 5현제의 4번째 황제로써 그의 시대는 정말 무난하고 제국이 잘 돌아가던 시대다. 그는 20년의 치세동안 수도 로마에서 벗어난 일이 거의 없었지만 제국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부에 내포한 위험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